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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굴하지 않은 시인 정신 그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폭력이 수반하는 고통의 무게는 어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된다.
폭력은 그 배후에서 정치권력의 광기가 스산한 웃음을 날릴 때, 그리고 은밀하고 음모 적인 방법으로 다가설 때 한층 더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 칼끝 같은 세상에서 여린 가슴으로 정직한 가락을 읊던 이 시대의 대표적 서정시인 박정만. 정치 꾼 도 재야인사도 운동가도 아니었던 그였지만 우연히 다가온 고문의 손아귀에서 힘없이 망가졌다. 스스로의 표현대로「대한민국처럼 짓이겨진」박 시인의 황폐한 삶이KBS-l TV 논픽션드라마『서러운 땀』(4일 밤 10시 극본 김상수·연출 윤흥식)을 통해 부활됐다.
이 드라마는 비록 가난하지만 출판사 편집장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박 시인이 어느 날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 모처로 연행돼 겪은 갖가지 고문과 그 후유증을 중심 줄거리로 하고 있다.
또 끝없는 절망과 허무의 나락 속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는 시인의 위대한 세계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 시인을 고문과의 연관 속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일면적 이해방식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를 한창 나이에 죽음에 이르게 한 요소로 어린 시절 겪은 어머니의 죽음, 가난과 가정파탄, 그리고 병고 등 개인적 불행을 빠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신의 곁에 결정적으로 다가서게 된 구체적 계기가 됐던 고문이 사라졌다는 결정적 증거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 드라마는 무차별 구타와 전기고문·물 고문 등 물리적 폭력만이 시인의 전존재를 결박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친척 가운데 재일 교포나 월북자가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과 빨갱이로 몰아가는 구태의연한 수법은 냉전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척박한 분단 국가에서 양심을 잠재우는 또 다른 매카시적 폭력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고통 속에서도 굽혀지지 않은 시인의 투철한 정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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