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총리 "대통령도 힘들어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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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내부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4일 오후 김혁규(오른쪽)·조배숙 최고위원이 당사에서 최고위원 사퇴 회견을 열고 지도부 일괄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사진위). 김두관 최고위원이 같은 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정동영 의장 퇴진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김근태 최고위원의 의장직 승계 방식으로는 당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지도부가 총사퇴해야 한다."(김혁규.조배숙 최고위원)

4일 오후 2시 열린우리당 서울 영등포 당사. 두 최고위원은 중진들의 집요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퇴 의사를 발표했다. 이들은 "중립적인 인사들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당 지도체제가 사실상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전날 임채정.문희상 의원 등 당 중진 12명이 모임을 열고 "남아 있는 지도부가 난국을 수습해야 한다"며 두 사람의 사퇴를 만류했었다.

열린우리당과 청와대.총리실은 하루 종일 어수선했다.

◆ 총체적 위기에 빠진 여당=선거 역사상 초유의 참패를 당한 여당은 요즘 노선.지역 간 갈등을 비롯해 온갖 갈등이 표출하고 있다.

당내에선 5.31 선거 때 김두관 최고위원의 '정동영 의장 사퇴' 발언에 반발했던 김혁규.조배숙 위원이 자신들의 사퇴 카드를 꺼내 김두관 위원의 동반 사퇴를 압박했다는 배경 설명이 나온다. 김두관 위원과 연대의 모습을 보여온 김근태 위원을 견제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김두관 위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내 갈등을 증폭시킨 데 대해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호남 지역의 한 의원은 "뒤늦게 사퇴도 아닌 무슨 사과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다른 의원은 "김 위원의 '민주당 합당론 비판 발언'은 견해 차이 이상이어서 당분간 봉합되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내 혼란을 수습할 묘책도 다양하게 제기된다. 일각에선 6선인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당 위기 상황을 수습할 '중립적인 인사'로 거론되나 본인은 완강하게 고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대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당을 계속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가운데 정동영 전 의장 측의 반발 가능성이 지적된다. 비대위의 권한이 커질 경우 향후 당권.대권 경쟁의 새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5.31 선거는 정치적 탄핵"=한명숙 총리는 4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우리당 소속 여성 의원 13명을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유승희 의원은 "5.31 선거결과는 '정치적 탄핵'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유 의원은 "부동산 정책도 청와대가 발표하지 말고 정부 부처가 발표하게 해달라. 발표 주체를 국세청으로 했다면 대통령과 국민이 맞장을 뜨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 총리는 "선거 이후에 대통령도 힘들어 하고 있다. 내가 가교 역할을 잘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한 총리 역시 선거 결과에 대해 쇼크에 가까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현 상황을 무척 어려워하고 얼굴도 야위었다"고 전했다.

한편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 간사인 박상돈 의원은 CBS 인터뷰에서 열린우리당을 '고장 난 자동차'에 비유했다. 2002년 4.15 총선 때 원내 과반 의석이라는 '새 차(열린우리당)'를 뽑았지만 잦은 고장과 서행, 급발진으로 만신창이가 됐다는 것이다. 박 의원은 "열린우리당이라는 차를 믿지 못하겠다며 승객(국민)이 모두 하차한 것이 5.31 선거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채병건 기자 <mfemc@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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