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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애늙은이…젊지만 속 깊어 기특한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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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그들과 무관하게 자연의 이치와 삶의 순리를 고집스레 노래하는 시인 몇몇이 최근 출몰했다. '출몰'이래야 옳다. 소위 '80년대의 경험'이 부재한(있어도 미미한) 70년대 이후 출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불쑥 나타난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손택수(35)를 비롯하여 문태준.신용목 등이 그들이다. 평론가 홍용희에 따르면 "재래적인 대지적 삶의 문법"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애늙은이' 시인들이다.

시집 제목이 '목련 전차'(창비)다. 목련, 꽃이다. 생태시 계열의 단골 소재다. 시집엔 꽃이나 풀 말고도 온갖 생물들이 얼굴을 내민다. 청둥오리.제비.닭 등 날것부터 명태.낙지.숭어.오징어 등 바닷것까지. 심지어 지렁이도 나온다.

앞서 '애늙은이'라고 부른 까닭이 있다. 물상 주무르는 솜씨가 여간 노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능청맞고, 때론 여유까지 부릴 줄 안다. 예서 그치면 상투적이란 소릴 들어야 맞다. 하나, 그렇지 않다. 시는 의외로 낯설다.

예컨대 벚나무는 실업률을 줄여준다. '겨우내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던 사람들이/벚나무 아래 노점을 차렸습니다/…/보다 보다 못해 벚나무들이 나선 것입니다/벚나무들이 전국 체인망을 가동시킨 것입니다'('벚나무 실업률'부분) 뻔한 대상을 뻔하게 말하지 않는다. 영 딴판의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곳이, 열린 감각의 발화점이다. 평론가 이장욱이 "오래된 미래의 풍경과 정서를 끌어오되, 안이한 시적 예찬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증거는 여럿이지만 '오징어 먹물에 붓을 찍다'만 부분 인용한다. 시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 읽히는 작품이다. '오징어 먹물로 쓴 글은 유난히 반지르르 윤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 글씨들 오래되면 희미하게 지워져서 마침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데, 바닷물에 담그면 먹빛이 그대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 바다 속에 수장된 뒤 부활하는 말들을 꿈꾼 적이 있는가 …먹물이 들려면 오징어 먹물쯤은 되어야 한다.'

젊은 사람 치고 시인은 제법 품이 넓다.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또래 시인들과 다르다. 부산역 광장 맨발의 노숙자와 하반신이 뭉텅 잘려나간 장애인, 그리고 추석 명절에도 술 취한 사내들을 받아내던 안마시술소 김양 누나까지, 낮은 곳의 사람들을 그는 바라볼 줄 안다. 기특하고 고맙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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