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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딜레머」해결방향 불확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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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권위주의정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로 전환, 이행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불확실성」이다. 앞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화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도 투명하지 않다. 모든 것이 불확실할 뿐이다.
오랫동안 강권과 힘에 의존해 통치해온 권위주의정권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정체·정권으로 바꿔는 막간이변환기이지만 이 시기에 있어서 정치게임을 규제, 운영하는데 필요한 규칙(rule)이 확립되어있지 않다. 민주화의 장래가 불확실한 이유는 바로 이점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리의 민주화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시작했다.
우리의 민주화는 권력의 전복, 즉 필리핀처럼 혁명적 변화 뒤에 온 민주화도 아니지만 선진민주국가처럼 평화로운 절차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권력의 이양도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화는 명분 없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5공 지배집단이 줄기차고 광범하게 지지 층을 확보한 민주화추진세력의 거센 힘에 굴복하여 스스로 「권력의 포기」를 택함으로써 실마리를 찾은 경우이며 그러면서 5공 지배집단의 온건세력이 기득권을 행사하여 추진한 민주화과정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혁명이라는 격렬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과거와의 명확한 단절을 갈망하는 급진주의자가 이러한 민주화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야당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고 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호기를 스스로 저버린 속에서 혁명적 변화에 의한 큰 혼란과 위험부담보다는 비록 권위주의정권세력이지만 권위주의체제를 해체·청산할 확고한 의지와 공약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감안할 때 그들에 의해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 「덜 나쁠 수도 있다」는 상황의 논리를 내세울 수 있다.
6공화국과 노태우 행정부의 정당성은 바로 이러한 논리와 기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6공화국이 헌법의 정신을 구현하여 안정된 정치질서로 우리사회에 뿌리를 내리느냐, 아니면 제7, 8공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정변을 거듭하느냐는 오로지 민주화의 성패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많은 국민은 앞으로 헌정 질서가 확립되어 행정부의 교체가 선거를 통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지는 변화를 바라지만 민주적 헌법을 토대로 구성한 6공화국은 영원히 존속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이 이끄는 현행정부가 이러한 국민적 기대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아래 출범한지 1년이 지나갔다. 1년이라는 시간은 변화의 속도와 폭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다. 사람마다 어느 정도의 속도와 폭을 기대하고 있느냐에 따라 시간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 정권의 수행능력에 대해 상이한 평가와 판단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 정부는 그 나름대로 자유화를 실시했다. 과거의 정권이 개인 및 사회집단을 자의적· 불법적으로 통제·탄압한 사실을 자성하고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실천해왔다. 우리사회가 인권의 「낙원」은 아니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인권을 존중하는 법치국가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민주화과정에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다.
즉 시민의 정치참여를 보강하는 규칙과 절차를 인정하고 정당의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했으며 우리사회가 당면한 다양한 쟁점과 문제에 대해 국민이 자유롭게 논의하고 해결책을 추구하도록 시민참여의 기회를 확대했다. 또한 철저하게 봉쇄·통제해왔던 노동단체의 활동을 자유화했다. 이 모든 변화는 오랫동안 권위주의정치의 살벌하고 강압적인 통치스타일에 의해 위축되어온 시민들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노 정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부정적인 비판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사고있는 것은 이 정부가 무언가 국민의 기대수준에 못 미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이 정부가 안고있는 일련의 딜레머의 처리와 해결에 있어서 명확한 방향 없이 허위적 거리고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5공 비리의 처리와 관련해서 딜레머가 있을 수 있다. 정치보복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도 공감한다. 그러나 사면정책으로 과거를 묻어버리기에는 5공 비리와 광주비극의 기억이 국민들 사이에 너무나 생생하다. 물론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때 우리의 역사적 비극은 종식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이념적 지지를 확보하고 새로운 정치질서의 윤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에 의한 것이든 비리와 광주참사의 최고책임자에 대한 준엄한 도덕적 심판이 내려져야만 한다. 현정부는 그러한 심판을 유보했다.
현정부는 분배의 딜레머를 안고 있다. 물론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를 시정하는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노사관계가 제도화되어 성장과 분배가 균형·양립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의 상황은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정부는 안보의 딜레머도 안고 있다. 그리고 북방정책과 안보상황의 기능적 관계가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러한 일련의 딜레머가 적시에 과감하고 창의성 있게 해소되지 못할 때 현정권은 정권의 차원에서 큰 위기에 봉착하겠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과정 자체가 좌절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민주화실현이 여야공동의 목표요, 최우선적인 목표라면 이러한 딜레머의 해결도 여야공동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이 시점에서 국민이 요구하는 「큰 정치」의 의미일 것이다. 【한배호(고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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