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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리 다른 종단 들 대동 단결-진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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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외에서 3·1운동의 태동에 큰 역할을 한 앞서의 네 개의 흐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에 따르는 국제정세의 변동을 독립운동 고양을 위한 기회로 기민하게 포착하여 적극적 활동을 전개했으나, 대규모 독립시위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민중과 함께 있는 국내독립운동 세력들이 이들과 함께 적극 활동해야 했다.
해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태동을 이어받아 국내에서 3·1운동을 초기에 적극 조직화하기 시작한 것은 다섯번째의 독립운동 세력인 천도교(중앙학교 포함) 독립 운동의 흐름이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간부들은 이 시기가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임을 논의하다가 상해로부터 신한 청년당의 밀사가 다녀가고 동경으로부터 송계백이「2·8독립 선언서」 원고를 갖고 찾아오자 큰 자극과 격려를 받고 본격적으로 3· 1운동의 준비와 초기조직화를 추진했다.

<천도고 측서 앞장>
권동진 오세창 촤린 등은 1919년 1월20일경 천도교주 손병희의 쾌락을 얻은 다음 3·1운동의 방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원칙에 합의하였다.
①독립운동을 대중화 하여야할 것.
②독립운동을 일원화 하여야할 것.
③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
천도교 간부들은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종교와의 연합에 의한 연합전선을 만들어야 함을 중시하여 독립 선언서를 준비함과 동시에 민족대 연합전선(일원화) 형성을 위한 다른 종단과의 교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여섯째의 독립운동 세력인 기독교 신교 측의 3·1운동 초기 조직화는 관서지방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이 별도로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다가 합류하였다.
관서지방의 기독교 장로교 계통은 상해 신한 청년당의 밀사 선우혁이 다녀간 직후부터 이승훈 양전백 윤원삼 안세환 함석원 등 이전의 신민회 세력이 중심이 되어 학생과 교회를 동원한 독립시위 운동을 준비하다가 2월7일 서울의 천도교 측으로부터 연합전선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승훈이 상경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의 감리교 파에서는 기독교 청년회 총무인 박희도가 청년부 회원 김원벽을 통하여 1919년 1월27일부터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을 모아놓고 독립시위 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울 장로교파의 이갑성도 이보다 뒤인 2월12일과 14일, 두 번에 걸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구내의 숙소에서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을 모아놓고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서울의 기독교 측 독립 운동 기획도 초기 조직화의 진행 도중에 천도교 측으로부터 연합전선 형성의 제의를 받게되었다.

<「2·8선언」에 자극>
일곱번째의 독립운동 세력인 청년 학생들의 3·1운동이 기획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1월 하순이었다. 이때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인 강기덕 김원벽 윤자영 김형기 김성득 김대우·한위건 한창환 주익 등이 모여 2월 3,4일경에 독립시위 운동을 일으킬 것에 합의하고 우선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을 조직화하고 독립 선언서를 준비하려고 하였다.
학생단의 독립운동의 급진전에 가장 큰 자극을 준 것은 상해에서 신한 청년당이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했다는 소식과 동경에서의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준비의 소식이었다.
이 무렵에 민족대 연합전선을 준비하고 있던 종교계 간부 측에서 학생단에게 ①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학생단이 총동원하여 시위행진을 할 것과 ②학생들이 전위가 되어 독립의사를 표현할 것을 요청하고 종교계와 연합전선을 형성할 것을 권고해왔다.
이에 학생단은 기성세대와 민족대 연합전선에 참가하되 학생단 독자적 독립운동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3·1운동의 초기 조직단계에서 이 운동이 대규모의 전 민족적 독립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 각 부문과 모든 종파계를 묶은 민족대 연합전선의 형성이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측은 이를 찰 인식하고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첫째로 천도교 측이 구 관료계 명사들과 연합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실패하였다. 천도교 측은 구 관료계 명사중에서 김윤식 윤용구 한규설 박영효 윤치호 등을 민족대표로 추대하려고 교섭했으나, 한규설만 긍정적 반응을 보였을 뿐 다른 경우는 모두 거절당하였다.
천도교 측은 다음으로 기독교와의 연합을 추진하여 오산 학교 교장으로 있던 기독교 지도자 이승훈과 교섭하였다.

<기초 조직에 성공>
이승훈이 이에 적극 호응하여 양측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극비리에 수 차례의 회의를 거듭하다가 모든 의견차이를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2월 24일 완전 합의가 이루어져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전선 형성을 이루게 되었다.
세째로 천도교 측 불교 측과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천도교 측은 기독교 측과의 연합에 성공하자 즉시 2월 24일 밤에 최린이 이전부터 독립운동을 주장해온 한용운을 방문하여 그간의 추진 상황을 설명하고 3·l운동에의 불교 측 참가를 요청하였다.
한용운은 즉석에서 쾌락하고 불교 측 동지들을 더 모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불교 승려들의 광범위한 호응은 얻지 못하고 백용성의 동의만을 얻었다. 그렇지만 당시 한용운은불교계의 대표적 독립투사로 불교 청년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한용운과 백용성의 참가로 사실상 불교계와의 연합전선은 형성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의 초기 조직자들은 네째로 유림과의 연합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천도교 측은 처음에 서울의 유림 대표격인 김윤식등과 연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뒤이어 불교 측의 한용운은 지방 유림의 대표격인 곽종석을 찾아가 교섭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3·1운동의 초기 조직자들은 다섯째로 학생단과의 연합을 추진하여 성공하였다.
학생단은 종교계 지도자들로부터 연합전선 형성의 제의가 오자 2월25일 회의를 열고 이에 적극 참가하여 그 전위대로서 헌신하여 활동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 4대 독립 운동세력의 대동 단결에 의한「민족대 연합전선」형성의 성공은 3·1운동을「대규모의 전민족적」독립운동으로 폭발시킨 기초 조직을 만드는데 성공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주로 농민층에 깊이 뿌리를 내려 매우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는 지식인층과 도시 시민 층에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불교는 일반서민층과 부녀 층에 강대한 세력을 가진 민중 종교였다. 학생 층은 전국에 걸쳐 가장 활동적인 선진적 지식층이었다. 아직도 지방에 강대한 세력을 가진 유림이 연합전선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지만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의 참가만으로도 전국적으로 독립시위 운동에 각계각층이 참가할 수 있는 조직이 망라된 셈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때 교리와 그 성립 배경이 전혀 판이하며 대립적이었던<동학>으로서의 천도교와<서학>으로서의 기독교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민족대 연합전선의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당시 기독교와 대립적이었던 불교(한용운 등) 가 이에 적극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천도교와 기독교 등이 종교보다도 민족 독립을 선행시켜 결단을 내린 매우 애국적인 획기적 처사였다.
서로 대립적이었던 동학과 서학이 나라의 독립과 겨레의 자중를 위하여 대동 단결해서 민족대 현합전선 형성을 성공시킨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획기적인 것이었다.
독립 선언서의 작성 책임은 천도교 측이 담당키로 하고, 독립 선언서의 원고는 천도교 측이 준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했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이종일이 총 실무를 담당하여 2월27일 2만1천장을 인쇄했다.

<2만1천장 인쇄>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 책임하에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으로 나누어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의 선정은 종교별로 추천을 받아 천도교에서 15인, 기독교에서 16인, 불교에서 2인이 서명하였다.
거사일자가 3월1일로 결정된 사실에 가장 큰 영향읕 끼친 것은 고종의 국장일이었다. 고종이 1월21일 승하했는데, 2월에는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민중 동원을 유리하게 하였다.
고종의 국장은 3월3일로서 이날 서울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국장일에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부정이라고 생각되었으므로 이 날은 피하기로 하였다. 3월4일이 논의되었으나, 만일 국장 당일에 폭동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독립운동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므로 고종의 국장일 이전에 거사하기로 했다.
3월 2일이 군중동원에 가장 적합한 날짜라고 생각되었으나 공교롭게도 3월 2일은 일요일이었으므로 기독교 측에서 반대했다. 따라서 하루 더 앞당겨 3월 1일이 거사일로서 만장일치로 합의되어 결정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민족대표 선정·거사일자의 결정을 끝으로 초기조직단계의 모든 준비는 완료되어 이제는 3월 1일, 봉기의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서울대 교수·한국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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