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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뀌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숙명여고로 격화된 ‘교육불신’

중앙일보

입력

중3 딸을 둔 김모(44‧서울 도곡동)씨는 최근 자녀 고입을 앞두고 밤잠을 설치고 있다. 올해 초까지는 대입 실적이 우수하기로 소문난 숙명여고에 들어가길 바랐다. 하지만 최근 숙명여고 시험 문제 유출 사태가 불거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숙명여고 진학을 바라보고 강남에 입성했기 때문에 안 보내자니 아쉽고, 보내자니 찝찝해서다. 김씨는 “이번 일이 숙명여고만의 문제라고 하면 안심하고 다른 고교에 진학시키면 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아 걱정”이라며 “숙명여고가 재수 없어서 걸렸을 뿐 다른 학교라고 별반 다를 것 같진 않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현직 교무부장의 쌍둥이 딸이 문·이과 전교 1등을 나란히 차지하면서 시험지 유출 의혹이 제기된 서울 숙명여고 학부모와 졸업생들이 지난 9월 해당 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조사를 촉구하며 집회를 여는 모습.[뉴스1]

현직 교무부장의 쌍둥이 딸이 문·이과 전교 1등을 나란히 차지하면서 시험지 유출 의혹이 제기된 서울 숙명여고 학부모와 졸업생들이 지난 9월 해당 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조사를 촉구하며 집회를 여는 모습.[뉴스1]

최근 교육계에서 잇따라 발생한 비리로 학부모들의 교육 불신이 격화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쌍둥이 딸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한 혐의를 받는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이 구속됐고, 앞서 서울의 한 국립대에서는 아버지가 편입생 아들에게 우수학점(A+)을 몰아준 사실이 국정감사 결과 드러났다.

회계부정?문제유출 등 교육비리 잇따라 #2년 전 정유라 부정입학 사태 데자뷰 #학부모 “숙명여고 사태 빙산의 일각” #전문가 “결과 만능주의 사회 부작용”

또 지난달에는 사립유치원 감사결과가 공개되면서 회계부정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6살 아들을 둔 정모(36‧서울 성내동)씨는 “요즘 뉴스를 보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 어디를 믿고 아이를 길러야 할지 모르겠다. 집에서 홈스쿨링 시키거나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면 유학 보내고 싶다”고 털어놨다.

2년 전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학점특혜가 불거진 정유라씨.[중앙포토]

2년 전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학점특혜가 불거진 정유라씨.[중앙포토]

교육계 비리는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다.
대표적인 게 2년 전 이맘때 불거진 ‘정유라 이대 특혜 사건’이다. 국정농단 사태의 장본인인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가 이화여대에 부정하게 입학하고 학점 특혜를 받은 것이다. 정씨는 당시 모집요강과 달리 서류마감일 이후 취득한 금메달을 인정받아 승마 특기자로 대학에 합격했고, 수업에 불참하고 부실한 과제를 제출했지만 제적당하지 않고 졸업했다.

이 사건은 당시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됐다.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키려고 고군분투한 학부모와 대입을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공부하던 학생을 광장으로 불러냈기 때문이다. 전문가 사이에서도 이들의 분노가 조기 대선과 정권 교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정씨는 대학은 물론 고교까지 입학이 취소돼 중졸로 남게 됐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에 경찰조사를 촉구하는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들고 있는 피켓. [뉴스1]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에 경찰조사를 촉구하는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들고 있는 피켓. [뉴스1]

학부모들은 “정권이 바뀌고 2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학생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당시 정유라 사건에 분노했던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인데, 요즘에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아이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할 책임을 가진 교육기관이 비리의 온상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비판했다. 초등1학년 자녀를 둔 김모(36‧서울 마천동)씨는 “최근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을 보면 ‘부모의 돈도 능력’이라던 정유라 말이 맞는 것 같다. 법과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짧은 시간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발생한 ‘결과 만능주의’의 부작용이라고 지적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진 게 문제”라며 “여기에 학부모의 높은 교육열과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선호 사상이 얽혀서 부정부패가 만연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사회 지도자부터 원리원칙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느냐”며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려면 이제라도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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