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선포 후 나는 영웅적인 왕-마르코스 재임 중 자필일기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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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마르코스」전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72년 당시 반체제 정치인 「베니그노·아키노」를 계엄령 발표와 함께 영장 없이 체포한 뒤 일기에서『나는 영웅적인 왕이다』라고 적었다.
「마르코스」가 재임시 자필로 쓴 일기의 일부가 지난 6일 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에 공개됐다.
2천 5백 페이지가 넘는 이 일기는「마르코스」가 지난 86년 마닐라를 탈출할 때 말라카냥 궁에 버리고 간 것으로 약 1년 전에 발견된 것이다.
이 일기에서 「마르코스」는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필리핀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갖기를 바랐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적고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그가 권위주의에 빠진 시기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 수백명의 정치적 반대자를 체포하고 이른바 「민주적 독재」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마르코스」는 두번째 대통령선거에서 압승했음에도 1970년 1월 1일 취임 직후부터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언론들은 부패와 선거부정을 보도했고 점쟁이들은 봄이 오기 전에 그가 암살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사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70년 12월 28일의 일기에서 「마르코스」는 『정부전복의 음모가 서서히 일고 있다. 이같은 위험은 지금 나에겐 분명한 것이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겐 그렇지 않다. 나는 정부전복음모와 나의 암살음모를 직시하고 있다… 테러리즘…?』이라고 썼다.
또 70년 2월 17일자 일기는 『나는 사태가 계속되면 독재권력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래도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즈음 「마르코스」의 보좌관들은 소요를 다스리기 위해 「더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유하고 「이멜다」도 독재정부가 국가발전을 위한 가장 좋은 정부형태라고 「마르코스」에게 권유했다. 군부도 계엄령선포를 지지했다.
70년 12월 31일자 일기에서 「마르코스」는 『분명하게도 사회와 정부는 휘청거리고 있다. 입법부는 오만하기만 하다. 시민들은 정부의 치적보다 가십에 더 관심이 많으며 언론매체는 헤드라인을 키우기 위해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져 뉴스를 조작하고 왜곡한다. 기업가들은 국민들 처지에 관심이 없고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다. 과격분자들도 오로지 권력장악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적었다.
71년 새해 아침 「마르코스」는 『나는 필요할 때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검토하고 있다. 나는 71년에 필리핀이 권위주의 정부를 맞이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고 썼다.
폭력은 8월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 폭력은 야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마르코스」는 이 사태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주장, 전국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영장 없는 체포를 명했다.
72년 9월 13일자 일기에서 「마르코스」는 『우리는 계엄령 선포를 마무리 지었다』고 적었다. 계엄령 선포시기는 9월 21일이었다.
22일 대통령 명령은 21일로 소급돼 발효되었다. 22일 새벽 언론인 다수와「코라손·아키노」현 대통령 부군인 「베니그노·아키노」를 포함한 야당정치인 50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었다. 거리의 시위는 중지되었고 민주주의도 중단되었다.
고무된 「마르코스」는 일기에서 『나는 영웅적인 왕이다』라고 썼다. 다음날인 23일 「마르코스」는 『그들은 새로운 날이 밝았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로스앤젤레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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