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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탄할 교권 자해행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총장 선출을 둘러싼 진통이 신학기를 맞게 될 대학가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가을 세종대가 교수·직원·학생대표로 구성된 「총장선출여론수렴위원회」를 만들어 이 위원회의 동의를 얻은 후보 중에서 전체 교수회의가 총장을 선출한다는 해괴한 총장 선출 방식이 도입되면서 학생이 총장을 선출하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지난 3일 동안 중앙대·고려대·숭실대에서 교수들의 협의단체인 교수협의회가 총장선출을 논의하는 도중 수백명의 학생들이 난입해 중앙대의 경우는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 총장 후보를 선출하고, 고려대는 교수회의 자체가 무산되고, 숭실대는 교수와 학생이 투표함을 놓고 승강이를 벌이는 소동을 벌였다.
황폐해진 대학재정을 눈앞에 두고서도 등록금인상 반대시위가 한바탕 불면 현상유지 쪽으로 슬며시 밀려버리고, 이 총장은 안되고 저 총장은 좋다면 그 쪽으로 기울어버리는 이것이 진정 대학의 자율인지, 교권의 회복인지, 학원의 민주화인지, 사립대학을 꾸러나가는 재단과 교수와 학생들은 정말 심각한 자기반성의 자리를 마련해야 할 때다.
정당한 일이라면 정당하게 설득하고 정당하게 추진시켜야함이 정당한 교권의 행사가 된다.
정당한 교권행위를 다수 학생의 시위에 눌려 포기해 버리는 교직자라면 교권을 논할 자격마저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교육권이라면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의미함과 동시에 「교육을 하는 권리」를 뜻하기도 한다. 「교육을 받을 권리」란 학습의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피교육자의 권리를 뜻하지만 「교육을 하는 권리」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교양할 권리를 지칭한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교육본질은 교육자의 애정과 피교육자의 존경 및 복종을 토대로 맺어지면서 교사가 가지는 교육권은 피교육자의 부모로부터 위임받은 권리행사가 된다.
더구나 이성과 자유의 본산이라고 스스로 일컬어온 대학사회에서의 교육권은 교수의 절대적 권한행사에 귀속된다.
더구나 이 교육권의 대표랄 수 있는 대학총장 선출에 피교육자인 학생이 난입, 개입한다는 사실은 서구적 교육이념에서나 전통적 수제관계의 이치에서나 납득할 수 없는 다수의 폭력일 수밖에 없다.
교수협의회가 총학생회 회장을 선출하는데 참여할 수 없듯이 학생회가 교수들의 대표인 총장을 선출하는 교수협의회에 참여할 수 없다.
다수의 횡포에 눌려 인상해야 될 등록금문제도 눈치보며 어물쩍거려 대학발전자체를 스스로 망가뜨리고, 교육권을 행사하는 당사자들이 모여 그 대표인 총장선출에까지 자신들의 의사를 후퇴시키는 행위 그 자체가 스스로 교육권을 포기하는 심각한 교권 자해행위인 것이다.
총장선출에는 총학생회 등 학내 자치단체가 모두 참여해야한다는 학생들의 주장 배경에는 의외에도 학생들 스스로가 대학을 기업으로 착각하고 대학생 스스로가 기업체의 대주주임을 과시하는 잘못된 사고의 틀이 존재하는게 아닐까. 학원의 자유와 자율이 완전히 배제되었던 저 어두웠던 시절, 대학이 기업처럼 우골탑처럼 부의 증식을 누렸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모두가 대학을 주식회사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자유와 자율이 주어진 오늘의 대학에서 학생 스스로 기업체의 대주주인양, 또는 기업체의 노동조합인양 필요에 따라 다수의 횡포를 적용한다면 정녕 대학의 자유와 권위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게 될 것인가.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때 대학의 공기는 맑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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