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책으로 읽는 월드컵 … 축구가 뭐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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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독재자도 혁명가도 좋아하는 것. 크리스찬도 무슬림도 좋아하는 것. 백인도 흑인도 좋아하는 것. 자본가도 노동자도 좋아하는 것. 폼나게 말하자면, 이념과 종교와 인종과 계급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 곰곰 생각해보건대, 아무래도 돈일 것 같다. 그러면 그 다음엔? 아마 축구가 아닐까.

2002 한일 월드컵 64경기의 시청자는 연인원 298억 명이었다. 결승전의 시청자만도 15억 명이었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소설? 드라마? 영화? 콘서트? 종교집회? 정치행사? 단번에 15억 명의 시선을 모을 만한 것이 있는가? 흔한 질문. 왜 60억 인류는 월드컵만 했다 하면 TV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는가.

닉 혼비는 그의 매력적인 축구 에세이집 '피버 피치'(문학사상사, 2005)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골을 넣는 것은 그들이지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남의 행운을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운을 자축하는 것이다. 재난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났을 때 우리를 집어삼키는 슬픔은 실은 자기연민이다. 선수들은 우리의 대리인이다. 팀이 나의 일부이듯 나도 팀의 일부다."

팀은 곧 '우리'라는 얘기다. '우리'는 축구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월드컵 때 TV를 보는 모든 이들이기도 하다. 개인을 거대한 우리로 만들어 주는 것이 비단 축구만은 아니겠지만 축구일 때 가장 극대화된다. 워낙 덩치가 커지다 보니 축구에는 부정적인 요소들도 만연해 있다. 필드 위에서의 비신사적인 파울 같은 것들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필드 밖의 파울들이 훨씬 더 심각하다.

이은호의 '축구의 문화사'(살림, 2004)가 들려주듯 축구에는 끔찍한 폭력사태도 비일비재하다. 노골적인 상업주의가 횡행한지는 오래됐다. 또 거대한 우리가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맹목적인 국가주의나 국수주의로 치달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또한 우리는 축구에서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프랭클린 포어는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말글빛냄, 2005)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론적으로 애국심과 사해동포주의는 완벽하게 양립해야만 한다. 당신은 다른 집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나 외부의 자극에 움츠러드는 일 없이 얼마든지 당신의 조국을 사랑할 수 있고 당신의 조국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이론만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신념이기도 하다."

그러한 생각은 이론만도, FC 바르셀로나의 신념만도 아니다. 이미 우리는 2002년 6월의 거리에서 바로 그것을 경험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때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다. 2002년 6월 이후 곧바로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해도 한번 그렇게 신명나게 놀아본 건 실로 대단한 일이다. 우리가 축구를 통해 표출해내는 모습, 곧 국수주의적인 우월감 혹은 열등감에 휩싸이거나 또는 사해동포주의적인 애국심을 담아내는 모습들이 우리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우리는 우리고, 우리가 되기 전의 '나'는? '우리'에 포함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5월 18일 새벽 3시 45분. 호나우디뉴와 앙리. 레이카르트와 웽거. 첼시와 AC 밀란을 이기고 올라온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를 돌려보낸 아스날 FC. 유럽 챔피언스 리그. 세계적인 선수들과 세계적인 감독이 있는 세계적인 클럽 간의 결승전.

그 시간에 TV 앞으로 모여든 이들은 두 팀의 팬들만이 아니다. 바르셀로나.런던의 시민들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의 수많은 이들이 TV 앞에서 숨죽이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1년에 단 한 번 있는 환상적인 90분을 만끽하면서. 왜 '우리' 선수들이 나오지도 않는 축구 경기를 보는가.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을 텐데.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애인과 데이트하면서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낼 수도 있을 텐데. 대답은 하나뿐이다. 재미있으니까.

앙리의 절묘한 골 감각을 보는 것이 책을 읽는 것보다 재미있으니까. 마법사 호나우디뉴의 현란한 플레이를 보는 것이 음악을 듣는 것보다 좋으니까. 골키퍼 레만이 퇴장을 당해 10명이 뛰면서도 오히려 아스날이 먼저 골을 넣는 경기 흐름이란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니까.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바르셀로나의 공격을 막아내는 아스날의 격렬한 수비를 보는 서스펜스란 어느 블록버스터의 그것에 못지않으니까.

승부의 추가 서서히 아스날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하던 시점에 바르셀로나의 동점골이 나오고 뒤이어 역전골이 터지는 순간이란 애인과의 어떤 순간보다도 짜릿하니까. 그러하기에 설령 옆에서 함께 보는 이들이 없다 해도, 굳이 '우리'가 되지 않는다 해도, 일제히 TV를 켜는 것이다. 축구에 빠져드는 것이다. 손꼽아 월드컵을 기다리는 것이다.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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