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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회 인정한 韓 ‘돼지→인간’ 장기 이식…법 없어 좌초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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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성 면역거부반응 유전자가 제거된 돼지의 모습.[연합뉴스]

초급성 면역거부반응 유전자가 제거된 돼지의 모습.[연합뉴스]

중증 저혈당이 있는 ‘1형 당뇨병’ 환자와 앞을 못 보는 ‘각막손상’ 환자에게 무균 미니돼지의 췌도(췌장 내 인슐린 분비 세포)와 각막을 이식하는 '이종(異種)이식' 임상시험이 이르면 내년 1월 국내 의료진에 의해 실시될 전망이다. 국내외 전문가로부터 임상시험 계획이 타당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임상시험은 해보지도 못하고 좌초될 수 있다. 현재로선 관련 법률과 주관 부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뇨병·각막손상 환자 위한 췌도·각막 이식 시도 #국내 의료진 임상계획에 국제전문가 “기준 적합” #내년 1월 추진…관련법·부처 부재로 무산 위기 #피어슨 하버드대 교수 "미국선 임상 이뤄졌을 것"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이종이식 임상시험 국제전문가 심의회 결과발표 기자회견에서 박정규 서울대 의대교수(왼쪽)가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오른쪽은 리처드 피어슨 국제이종이식학회 윤리위원장. [뉴스1]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이종이식 임상시험 국제전문가 심의회 결과발표 기자회견에서 박정규 서울대 의대교수(왼쪽)가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오른쪽은 리처드 피어슨 국제이종이식학회 윤리위원장. [뉴스1]

박정규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장(서울대 의대 교수)는 17일 서울대 의대 행정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이종이식학회(IXA)와 세계이식학회(TTS) 전문가들로부터 이종이식에 대한 임상 준비과정을 평가받았다”며 “이르면 2019년 1월 임상시험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종 이식은 인간의 조직 및 장기를 대체하기 위해 특수하게 개발된 동물의 조직 및 장기를 인간에 이식하는 기술을 일컫는다. 장기이식 대기자 수는 매년 증가하는 데 반해 이식에 필요한 장기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문제를 해소하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업단은 인슐린을 분비하는 세포 덩어리인 췌도를 무균 미니돼지의 췌장에서 분리해 제1형 당뇨병 환자에게 이식하려 한다. 제1형 당뇨병은 췌도에서 인슐린 분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저혈당이 생기는 병이다.

박정규 단장에 따르면 1형 당뇨병은 자가면역질환으로, 사람의 췌도를 이식하더라도 환자의 자가면역세포로 인해 사람의 췌도가 파괴된다. 돼지 췌도는 면역학적으로 장점이 많아 자가면역세포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췌도를 이식하더라도 보통 뇌사자 2~4명의 췌도를 분리해야 환자 1명에게 이식할 수 있다. 박 단장은 “사업단이 임상에 사용하는 돼지는 세균으로부터 감염 위험을 제거한 ‘무균 돼지’로, 향후 안전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 등 형질 전환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돼지 각막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임상 시험은 돼지췌도 이식환자의 경과를 지켜본 후 추가로 진행될 예정이다. 임상 대상자는 양쪽 눈이 모두 보이지 않는 실명환자가 선택될 것으로 보인다.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이종이식 임상시험 국제전문가 심의회 결과발표 기자회견에서 리차드 엔 피어슨 하버드의과대학 교수(왼쪽 네번째)가 발언을 하고 있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리처드 피어슨 교수를 비롯한 국제전문가들은 "이종 췌도 및 각막 이식 연구진들의 성과에 찬사를 보낸다"며 "이종이식 임상시험 수행을 위해 한국의 관련 법규와 정부차원의 감독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뉴스1]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이종이식 임상시험 국제전문가 심의회 결과발표 기자회견에서 리차드 엔 피어슨 하버드의과대학 교수(왼쪽 네번째)가 발언을 하고 있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리처드 피어슨 교수를 비롯한 국제전문가들은 "이종 췌도 및 각막 이식 연구진들의 성과에 찬사를 보낸다"며 "이종이식 임상시험 수행을 위해 한국의 관련 법규와 정부차원의 감독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뉴스1]

문제는 이종이식 임상시험이 국내에서 진행되기 어려운 환경이란 점이다. 이식수술 후 환자 상태를 평생 추적·관찰하는 정부기관과 법률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사업단이 진행하려는 임상시험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면 환자를 평생 추적·관찰하는 법률과 감독기관이 필요하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와 IXA 등은 가이드라인을 통해 ‘이종 이식을 할 경우 자국의 관리 감독(규제) 하에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종이식 특성상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감염이 이식받은 사람에게 발생할 수 있어서다. 앞서 1997년 스웨덴, 2005년 중국에서 돼지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임상이 이뤄졌으나 국제기준을 따르지 않아 연구성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미국·일본·유럽·인도 등에선 이종이식 임상시험에 관한 규정을 담은 규제를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규제가 마련돼있지 않다. 2016년 이종이식과 관련한 2건의 첨단재생의료법안이 발의됐으나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박 단장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정부 내 어느 곳도 이종이식과 관련한 관리기구가 아니라고 해 연구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아마도 관련 법률이 없기에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업단은 현행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과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감염병)의 일부 조항을 근거로 임상을 진행한 뒤 앞으로 근거 법률을 마련하는 방향을 추진할 계획이다. 사업단의 권복규 교수(이화여대 의대)는 “현행 법률과 규제로도 2년간은 환자 추적ㆍ관찰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하지만 현행 생명윤리법이나 감염법을 통해서도 평생 추적이 가능하다는 보건복지부의 유권해석을 받아야 임상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업단의 임상시험 계획을 평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IXA와 TTS 윤리위원회 전문가들도 “한국이 이종이식 임상을 진행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지만 법률 근거가 부족한 만큼 담당 정부기관으로부터 생명윤리법 등에 대한 유권해석을 받아달라”고 권고했다. 리처드 피어슨 IXA 윤리위원장(하버드대 의대 교수)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종이식에 대한 모든 규제와 시스템을 마련했다”며 “만약 사업단이 이번 임상시험 계획을 미국에서 신청했다면 FDA의 승인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단장은 “사업단이 이종 장기이식 분야에서 쌓아온 연구개발 성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지난 15년 간 약 5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지만, 사업단의 회기가 끝나기 전에 임상시험을 시행하지 않으면 이종 장기이식 인적자원과 노하우를 모두 잃게 돼 국가적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단의 연구 기간은 내년 5월까지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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