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가지 더 신경 쓰는 정치|김동수<외신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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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러 해전 서울지하철 공사가 한창일 때 화장실공사는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공사장에 나가 공사기술자들에게 자상하게 가르쳐 준 대통령이 있었다. 프로복싱선수가 챔피언이 되거나 스포츠선수들이 외국선수와 겨루어 우승하면 빼놓지 않고 가장 먼저 축전을 보내던 대통령이었다.
그 시절 공사과정은 대통령보다 기술자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런 가르침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귀띔 해준 사람도 없었고 언론에도 대통령의 자상한 면모를 풍기는 가 화로 소개됐었다.
스포츠 인들에 대한 축전이 천편일률적으로 나와도 신주 모시듯 신문 지면에 게재되는데 신경을 썼지 그 때문에 대통령이 그릇으로서 어떻게 평가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시 그는 외형적으로 강력한 권위를 내보였고 자신이 그 권위를 믿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소불위로 만사에 시시콜콜하게 관여함으로써 스스로 그 권위를 깎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 직책을 맡고서 신문 가십 기사거리에나 맞는 일들에 바빴던 것이다. 그런 일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고 그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예고 없이」찾아다니는 자질구레한 행차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시절 신문을 들춰보면 이「예고 없는」행차는 말단공무원의 근무태도점검에서 시정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통치자의 자상함과 부지런함을 은연중 돋보이도록 다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우화 같은 에피소드가 하잘것없는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은데 문제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는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자신의 기능을 모른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고 예고 없는 행차가 잦았다는 것은 그만큼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 주변에서 즐겨 쓰던 말을 빌자면 4천만의「통치권자」가 그런 성향을 가졌다는데 1961년 5·16이후 우리의 비극이 있었다.
정치기술로 말하자면 그런 행동이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욱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정치질서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이 시점에서 지난날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비슷한 인상을 받는 일이 있다면 지나친 기하일까.
요즈음 진행된 대통령의 정부 각 부처 업무보고행사에서 몇 가지 눈에 띈 자질구레한 기사가 있었다.
예컨대 일반기사가 아닌 정치 가십기사 중 문교부관리들에게 올림픽 때 다친 고등학생들이 아직 입원해 있다는데 관계기관과 협의해 뒷바라지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 대목이었다.
의당 지나는 길에 생각나서 대통령으로서 할 수도 있는 얘기이기는 하다. 문제는 그런 가십을 흘려 내보냄으로써 자상한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가 미화된다고 판단하는 홍보시스템의 발상이다.
큰 줄기를 다듬기보다는 잔가지에 더 공을 들이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일이 거듭되면 과거의 예를 연상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일은 다른 정치지도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고추 값이 폭락해 정책을 마련하라고 항의하는 농민들로부터 집 앞에 쌓아 놓은 고추를 모두 사들였다는 정치인의 선심은 있었지만 정작 그 항의의 원인이 되는 정책문제를 크게 거론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역시 큰 줄기보다는 가지에 더 신경을 쓴다는 얘기다.
어느 정당의 지도자는 실향민과 관련된 기관을「예고 없이」찾아가 문제점을 얘기 듣고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도와 줄 것을 약속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당의 기능은 여론을 수렴하여 미리 정책을 제시하고 마련하는데 있다고들 한다. 어느 기관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야 대책을 세우겠다는 것은 실상 무책이란 말이나 마찬가지다. 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 정당으로서는 정책을 마련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책이라는 큰 줄기보다는 역시 인기라는 잔가지에 더 관심이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비단 그런 문제뿐이 아니다.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대통령의 중간평가문제에 대해서도 『국민의 뜻에 따라서 나중에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힌 정당의 지도자가 있었다. 공 당의 지도자로서 분명 중간평가문제에 관한 주장과 원칙이 있음직 한데도『국민의 뜻』으로 미루고 있는 인상이다.
내자신의 원칙이야 어떻든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존중하겠다는 의미로 좋게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책임질 말은 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일면으로 비치는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어떠한 고도의 정략적인 발상이든 시류에 따라 그 시류를 원칙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역시 큰 줄기는 제쳐놓고 당 장의 이를 좇아 가지만을 보는데서 오는 현상이다.
이런 가십 성 얘기들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때가 빨리 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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