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농산물개방-울며 겨자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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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미통상마찰의 1차적 과제가 농산물수입개방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까. 정부로서도 불공정무역국가로 지정 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농산물수입예시화계획(89∼91년)을 낼 모양입니다. 그러나 미국측이 여기에 만족할지는 알 수 없고, 공(구)을 넘겨 반응을 보는 정도겠지요.』(정영일 서울대교수)
대외개방과 관련, 올해 최대현안인 농산물개방문제를 보는 시각은 당사자인 농민은 물론정부나 전문가들 사이에도 이처럼 어둡다.
모든 대외개방문제가 국내문제와 연결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농산물처럼 「개방」그 자체에 대한 1차적인 찬반논의 단계에서부터 심한 진통을 겪고 있는 예도 드물다. 대세논에 따라 문을 연다해도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열어야되는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할 일들이 첩첩산중이다.
한편 농산물시장을 열라는 외압은 올해 연초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 10일 미국측 요청으로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포도주협상이 우리측의 상당한 양보로 타결된 것을 시발로 16일부터는 GATT 쇠고기패널2차 회의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중이다.
또 올해 6월중에는 GATT에서 국제수지위원회(BOP)가 열려 우리의 농산물수입제한 제도를 본격적으로 심의할 예정이다.
그동안 우리는 국제수지적자를 이유로 주로 농산물인 5백35개 품목(HS10단위기준)의 수입제한을 정당화해왔는데 금년 말이면 채권국으로 올라서는 마당에 현재로선 우리의 주장이 더 이상 먹혀들 처지는 아니다. 따라서 종전처럼 단순히 쇠고기나 포도주 등 한 두개 개별품목의 개방요구가 아닌 올해에는 농수산물전체에 대한 개방압력의 물결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농산물의 수입개방문제가 풀기 어려운 난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몰라서가 아니라 농업부문의 구조조정이라는 숙제를 전제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농산물은 개방의 경우 손해를 보고, 이익을 보는 집단이 분명히 갈리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피해당사자인 농민들의 반발도 거셀 수밖에 없다.
경제기획원의 김영태대외경제조정실장은 『일본·대만 등 경쟁대상국에 비해 국내 농업의 개방문제가 훨씬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는 것은 개방자체가 농민들에게는 당장 「소득의 상실」로 연결되고 또 농업의 특성상 작물에 따라서는 주산지가 정해져있어 지역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한·일·대만의 농가소득구조를 뜯어보면 전체소득 중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농촌공업화가 진전된 일본이 l8.3%, 대만이 36.4%인 반면 우리는 최근에 그 비중이 줄고 있기는 하나 61.5%로 절반을 훨씬 웃돌고 있다. 즉 어떤 특정품목을 개방할 경우, 일본·대만보다 우리에게는 소득이 줄어드는 몫이 커 반발도 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지역경제문제는 예컨대 오렌지를 개방하면 주산지인 제주감귤재배농가가 큰 타격을 받게 되어있다.
정부는 일단 이런 문제들을 감안, 경지개발·영농기계화 등 농촌개발투자를 대폭 확대해 농업생산성을 높여감으로써 장기적인 농업구조의 조정을 단행하며 당장 개방으로 피해를 보는 농가에는 보완대책을 마련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나가고 있다. 이와 함께 대외개방압력에는 우리가 스스로 단기농수산물수입예시화계획(89∼91년)은 물론 중·장기 예시화계획도 마련해 시간을 벌면서 농수산물의 시장을 열어간다는 생각이다.
『농업의 생산성이 공업을 못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다면 농민들과 도시민들의 소득격차는 벌어지는 게 뻔합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극대로 둘 수 없다면 해결방법은 농업종사자를 줄이든가, 농업을 좀더 생산성 있는 산업으로 키워나가는 길뿐입니다.』 김실장은 정부가 선택한 길도 결국 이 두 방법을 동시에 추구해나가자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해 6차 5개년계획(88∼92년)을 수정, 92년까지 10조원을 농어촌개발에 투입하며 올해는 2조1천5백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물론 여기에는 농수산물의 개방자체가 대외여건상 불가피하기 때문에 이에 대처한다는 측면도 있으나, 이를 잘 활용하면 농업구조의 개선도 효율적으로 촉진할 수 있다는 정부 나름의 속셈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정책방향에 농민들이 얼마나 손을 들고 따라주느냐 하는데 걸려있다.
오히려 지난해 이후 민주화추세를 타고 뜨거워진 욕구분출로 농민들도 소리를 높여가고 있을 뿐이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전국농민협회·가톨릭농민회 등 전국 14개 농어민단체가 「전국농민단체협의회」를 결성,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농수산물수임개방반대』 시위를 벌였고 개방문제가 이슈화되어 갈수록 반대의 소리는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전국농업기술자협회 김성태사무국장은 『식량자급도가 50%가 안 되는 현실에서 농민들이라고 맹목적으로 수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농정이 무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제까지의 농정이 신뢰를 잃어왔기 때문에 앉아있기 보다는 우리의 권익을 찾자는 게 농민들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농수산물수입개방이 가속화될 경우 『또 당하고만 마는 것이 아닌가』하는 분위기가 농촌전체에 짙게 깔러있다는 것이다.
정교수는 이에 대해 정부가 향후의 농업정책을 분명히 「가시화」해 개방에 따른 농민들의 불안감을 씻어줘야 한다고 전제하고 『영농의지를 가진 농민에게는 농사를 짓고도 살 수 있게 뒷받침하며 또 농촌인구 노령화와 관련해 노인들에게는 보완대책을 마련, 은퇴를 쉽게 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옥농촌경제연구원연구위원은 『물이 산에서 강으로 흘러가듯 대외개방이 어차피 대세며, 문을 닫고 사는 것보다 열고 사는 것이 국민경제전체로도 득이라면 사실인식을 명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정부도 드러낼 점은 뚜렷히 드러내며 농민단체들도 개방에 대한 무조건 반대보다 현실을 농민들에게 이해시켜 대비의 자세를 갖도록 해야한다』고 밝혔다.
미국·EC간의 끈질긴 농산물무역전쟁에서 드러나듯이 선진국들도 농업보호정책을 쓰고 있는데는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문제는 국가경제의 차원에서 『양보』와 『고수』 의 선을 그어 전체경제에 득이 되도록 국민적 합의를 유도해 가야 할 것이다.
결국 올해 농산물개방문제는 대외적인 통상문제보다 국내농촌·농업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에서 해답이 찾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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