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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약속보다 실천에 역점|국민협조 구하는「호소」로 일관|중간평가·지자제 등 국민기대 못 미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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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은 획기적이거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폭보다 이미 그동안 누차 밝혀온 국정의 방향을 변화된 현실에 맞게 재정리해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데 더 비중을 둔 것 같다.
따라서 대통령이 통치적 위상에서 국민들에게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새로운 내용이 별로 없고 화끈한 면도 없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이 말로써 하는 것은 그만하고 국민들이 실감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시적 실적을 보여야할 때라는 견지에서 보면 대통령의 메시지는 국민의 협조를 구하는 「호소」에 가깝다.
다만 대통령의 현실인식이 매우 심각함을 엿보게 하는 편린들이 도처에서 발견되며 그런 의미에서 전체적인 흐름은 강한 자신감이나 강자적 결단보다는 약간 힘이 달리는 입장에서 취하는 위기극복을 위한「안간힘」같은 것이 엿보인다. 가장 단적인 예가 중간평가와 지자제에 관한 언급이다.
중간평가는 사실 지금쯤 노대통령이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와 구체적 스케줄을 밝혀주기를 기다리는 큰 국민적 관심사다. 그럼에도 노대통령의 대답은 수차 밝힌 원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오히려 국민의 일반적 인식을 후퇴시키는 방향의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
즉 중간평가는 민주화를 실천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반드시 지키기는 하되 그공약을 했을 때의 상황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신이 약속한 것은 「여대」의 대통령이 군림하거나 장기집권과 독재로 나가는 전철을 밟지 않고 오로지 민주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이같은 논리에서 그는 주목할만한 전제조건을 붙였다. 헌정질서의 혼란이나 불필요한 국력낭비가 초래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고려해 중간평가의 합리적인 시기와 방법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헌법대로 하겠다는 것은 헌법의 규정에 없는 대통령의 임기를 건 신임투표는 안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또「불필요한 국력낭비」는 야당의 조직적이고도 극렬한 반대속에 방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신임을 획득하는 국민투표 방식은 지양하겠다는 의미일수가 있다.
결국 중간평가에 대한 노대통령의 본심은 신임투표성격의 국민투표가 아닌 다른 방법을 찾고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으며 바로 이점이 금후 새로운 정치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중간평가는 곧 신임투표라는 선입견을 갖고있는 국민들이 많고 야당들은 필시 이점에 착안, 노대통령을 약속위반이라고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자제에 대해서도 노대통령은 야당들의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복안을 밝혔다.
시·도 등 광역자치단체와 시·군·구 등의 지방의회선거는 금년 내에 실시하되 야당들이 집착하고 있는 자치단체장까지 한꺼번에 실시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단계적 실시를 제시했다. 이는 야당이 국회에서 그들의 의도대로 지자제법을 통과시키면 거부권행사라도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분석된다.
5공 청산문제에 관한 노대통령의 인식은 지금 정부와 국회가 하고있는 정산작업 이상 어떻게 더 할 방법이 없으며, 더 이상 하는 것은 정치보복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직전 대통령이 은둔하고 그의 친·인척들이 구속된 것은 다른 선진국가에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전직 대통령을 국회청문회에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또 민정당 당적을 떠나거나 공작이나 인위적인 작용에 의해 정계 개편을 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으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보수연합」이란 반민주폭력혁명 세력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정치인·정당뿐 아니라 기업 등 사회 각 부문 지도층을 망라하는 것이라고 밝혀 일부 야당과의 정당 연합추진을 부인했다. 물론 내각제개헌도 지금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일축했다.
이렇게 볼 때 노대통령이 국내정치 현안에 관해 새로이 전향적 회담이나 약속을 한 것은 별로 없다. 오직 약속은 자신의 할 일을 강력히 실천하는 것이며 정부를 믿고 협조해 달라는 것이다. 오히려 구체적 표현은 감추어져 있지만 국내정치에 관한 지금의 여론이 다소 오도되고있지 않느냐는 안타까움이 인식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 같다.
회견에서 노대통령은 좌격 폭력세력과 과격한 폭력분규에는 엄정한 공권력행사를 다시금 다짐했다. 민주사회에서 허용되는 것과 안되는 것의 확연한 구분을 짓겠다고 했다. 또 군의 정치적 개입을 우려하는 것은 지난날의 경험에서 나온 기우라고 단언했다.
이는 민주발전은 자신이 다소 「무르다」는 인식을 받더라도 새로운 권위·자생력이 생길 때까지 참고 추진하겠지만 질서와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우리사회 양극단의 도전과 논리에 대해서는 이제 단호히 맞서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으로 풀이된다.
남북문제·외교문제·경제문제에 관해서는 신중한 낙관론으로 일관했으며 금년의 고비를 잘 넘기면 선진국진입과 민주발전·통일의 돌파구마련 등 호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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