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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번스타인 제왕 리더십 이제 안 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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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에서 작곡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지휘를 공부한 후 귀국해 국내 주요 교향악단을 두루 지휘한 정치용. 그가 현대적 오케스트라의 변화하는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에서 작곡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지휘를 공부한 후 귀국해 국내 주요 교향악단을 두루 지휘한 정치용. 그가 현대적 오케스트라의 변화하는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휘자만큼 콘서트홀에서 통솔권이 분명한 음악가는 없다. 많게는 100여 명의 연주자를 가느다란 지휘봉 하나로 끌고 가는 지휘자의 리더십은 연구 대상이다. 지휘자는 무대 위에서만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 뒤의 연습실, 그보다 더 뒤의 많은 공간에서 조직의 구성원, 즉 단원과 소통하고 때로는 협상한다.

지휘 20년 정치용이 본 교향악단 #21세기 오케스트라는 자유 추구 #음악 흐름·스타일부터 제시해야 #단원들은 프로, 채찍보다 격려를 #코리안심포니 새 예술감독 맡아 #브람스 음반 내고 해외 공연도

지휘자 정치용(61)은 지난 1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1985년 창단한 코리안심포니는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등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매년 40회 이상 하는 교향악단이다. 재단법인이지만 문체부 산하에 있는 전문예술법인이다.

정치용은 코리안심포니 이전에도 신생 오케스트라, 수십 년 된 교향악단, 지방 악단 등을 이끌었다. 1997년 원주시향 수석 지휘자로 시작해 99년 서울시향 단장, 2008년 창원시향, 2015년 인천시향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정치용에게 지휘자의 리더십에 관해 물었다. 20여 년 동안 그가 발견한 리더십의 조건을 간추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왼쪽)과 레너드 번스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왼쪽)과 레너드 번스타인.

◆속박의 시대는 지났다=1990년대까지는 강력한 지휘자의 시대였다. 카라얀·번스타인 같은 지휘자의 음악엔 굉장한 응집력이 있고 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연주엔 자연스러움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연주자 하나하나가 솔로나 앙상블 하듯 음악을 느끼면서 자유로워야 한다.

21세기 유럽 오케스트라를 보면 굉장히 자유롭다. 강력한 제왕 스타일의 지휘자는 통하지 않는 시대다. 20여 년 사이에 같은 곡에 대한 훨씬 많은 연주 경험을 쌓으며 오케스트라의 역량이 올라갔고 단원들 스스로가 음악을 만들고 싶어하는 열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표현은 짧고 간결하게=지휘자의 성향은 연습 방식에서 드러난다. 부분을 나눠서 지적하고 연습을 엄청나게 시키는 지휘자들이 있는가 하면 뜬구름 잡듯이 느낌을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짧고 간결한 연습을 선호한다. 말도 많이 안 한다. 음악 전체의 큰 흐름과 스타일만 깨닫게 한다. 나머지 음악적 역량은 연주자들이 해결할 일이다. 강요에 의하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야 하고, 그건 그만큼 큰 책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확고한 비전부터=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처음 만나는 지휘자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지휘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거나, 권위가 있어 보이는 외국인이든가, 어딘지 호감 가는 인상을 줄 경우는 예외다. (웃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원들이 지휘자의 스타일을 먼저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을 연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이때 단원들과 지휘자의 스타일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지휘 역량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관계는 최악이 된다. 지휘자가 음악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음악만큼은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신뢰가 실력 향상의 지름길=예를 들어 어떤 관악기 주자가 연주를 너무 못한다. 이러면 청중·연주자·지휘자 모두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때 지휘자는 뭘 해야 하느냐. 방법이 몇 가지밖에 없다. 그 단원을 갈아 치우든지, 혹은 그 사람이 200% 실력을 낼 수 있게 만들든지. 나는 후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나. 옛날식으로 하면 다시 연주해봐라, 또다시, 다시, 하면서 잘할 때까지 훈련할 수 있다. 카라얀은 ‘못하는 단원들을 다 묶어서 물에 빠뜨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럴 경우 단원들이 자유로움을 잃어버린다. 단원들은 학생도 아니고 프로 연주자들이다. 자기 위치에서 최선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게 내 역할이다. 지휘자가 할 수 있는 건 격려뿐이다.

◆조직의 정체성을 만들어야=카라얀은 원하는 사운드를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는 처음 만난 후 5년쯤 되면 무리 없이 소통되는 느낌을 받는다. 코리안심포니의 경우엔 80명의 단원으로 한 해 120회 연주를 한다. 경험이 많아 지휘자의 요구에 빨리 반응하는 오케스트라다. 하지만 더 고유한 색이 있어야 한다.

올해는 전통적인 작품들을 연주하며 오케스트라의 정체성 만드는 노력을 했다. 국내에서 거의 연주되지 않는 스크리아빈 교향곡 2번, 닐센 교향곡 4번을 무대에 올렸다. 현재는 오페라나 발레 연주가 많지만 정기연주회 횟수를 더 늘려 교향곡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해 단원들의 자율성이 더욱 중요하다.

도쿄 필하모닉의 경우엔 연 400회 공연하기 때문에 연습 없이 무대에 올라가는 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단원들의 개인별 준비 수준은 세계 어떤 오케스트라도 못 따라간다. 이렇게 되면 지휘자가 연습 시간을 꽉꽉 채울 필요도 없고 음악적 색채를 드러낼 가능성도 훨씬 커진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현재 단원 수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90~100명은 돼야 한다.

정치용은 지난달 코리안심포니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녹음했고 곧 음반으로 낸다. 지난달 말엔 태국과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한국 대표로 연주를 했다. 그간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위해 청중에게 다소 생소한 곡들을 연주했고 내년에도 본 윌리엄스, 스크리아빈 등 어려운 곡들을 골랐다.

“모든 단원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음악을 하게 하는 것이 장기적 목표다. 하지만 당장에는 한 무대에서 성취감을 가진 단원이 한 명이라도 늘어난다면 지휘자로서 더 기쁜 게 없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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