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한국화의 새진로 개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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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타계한 이응로화백의 생애와 작품세계
고암 이응로화백이 85세로 이역 파리에서 별세했다. 공교롭게도 이화백은 13년이라는 국내화단과의 단절끝에 호암갤러리에서 지난 1일부터 개인전을 갖고 있었다.
그가 유명을 달리하던 시각을 전후해 서울호암갤러리에서는 고인의 별세사실을 알지 못한채 동생 흥로씨와 전부인 박귀희씨를 비롯한 친·인척들이 모여 이화백의 작품 해금에 이어 어렵게 마련된 개인전을 축하하는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파티후 이화백의 별세소식을 전해들은 동생 흥노씨는 『이달말 파리로 가 형님을 모셔오기로 약속이 돼있었다』며 『염원이던 고국방문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채 이역 하늘 아래서 눈을 감고말았다』 고 한스러워했다.
1904년 충남홍성에서 태어난 이화백은 20세 무렵 서울로 와 당대의 서화대가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다.
그림을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 선전에 출품한 『묵죽도』가 입선, 정식으로 화단에 데뷔한 그는 1936년 일본 가와바타 (천단)미술학교에 유학, 일본남화의 대가인 「마쓰바야시」(송림계월)에게 사사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일본화의 영향을 배제한 전통한국회화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배령·장우성등과 단구미술학원을 개설하고 홍익대·서라벌예대 교수로 후학지도에 전념하는등 건국 초창기의 한국화단에서 폭넓은 활동을 계속하다가 58년 주한서독대사「헤르츠」씨의 주선으로 서독에서 첫 해외전을 갖게된 것을 계기로 파리화단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이화백은 30년 남짓동안 동양화의 정통수묵정신에 서양화의 조형기법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파리를 중심으로한 유럽화단의 주목과 평가를 한 몸에 받았다.
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명예상을 수상, 일약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한 그는 60년대 중반부터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열어 벽안의 그곳 외국인들에게 묵화·서예등을 가르쳐오면서 문하생만도 이미 3천여명을 배출했다.
그는 67년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77년에는 백건우·윤정희부부납치 음모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이 두사건에 대해 완강히 입을 다물어 왔으나 최근 동백림사건에 대해서는 『6·25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보려다 얽혀든 사건이었다』고 해명하고 『백·윤납치 미수사건은 훗날 저절로 밝혀지겠지만 납치같은 비도덕적 형사범이라면 프랑스 정부가 왜 나를 보호해주었겠는가』 라고 반문했다.
파리 정착이후 이화백이 보여준 작품 경향의 특징은 회화의 기법·양식이 다양화하고 있고 미술장르의 벽을 허무는 대담한 실험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콜라주와 순수한 한지작업, 기호화된 문자에 의한 구성적 추상회화, 전통적인 동양화수법에 의한 서예적인 수묵화가 자재로 구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판화·목조·태피스트리·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영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 및 정치사건과 관련된 국내와의 단절때문에 많은 번민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국내정세가 변해 자신의 작품이 호암갤러리에서 전시되면서 한국국민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특히 지난해 12월23일 결성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지도위원으로 추대됐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화백이 85회 생일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별세하는 바람에 파리의 유족측은 빈소나 장례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병원관계자들 외에는 가족 가운데 아무도 임종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고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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