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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양승태, 전직 사법부 수장의 책임감과 품격 보여줘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2018년 9월 30일’은 사법부의 치욕스러운 날 중 하나로 기록되게 됐다.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무더기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는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을 겪은 것이다. 검찰은 어제 고영한 전 대법관의 자택과 박병대·차한성 전 대법관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해선 “주거지에 증거가 있을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개인 차량만 압수수색 대상이 됐다.

검찰의 향후 수사는 전직 대법관과 대법원장에 대한 소환 조사에 이어 일부에 대해선 구속영장까지 청구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부 창설 70주년 행사 때 청와대와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을 질타한 데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힌 만큼 검찰의 대응은 한층 강경해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중의 여론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 양 전 대법원장의 입장에선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작금의 사법부 위기는 자신 때문에 비롯된 점을 인식하고 사태 해결을 위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가 상고법원 설치라는 업적을 만들기 위해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들을 동원해 정치권과 언론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했던 의혹은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정치 보복’이라는 해묵은 주장에서 벗어나 지금이라도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으면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6년간 사법부 수장을 지낸 우리 사회의 최고위급 지도자로서의 품격과 권위를 보여줘야 한다. 이는 사법부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많은 리더가 무능을 감추고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것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 병리 현상이다. 잘못에 대해 책임지려는 자세야말로 ‘상처투성이인 고목(古木)’을 자처했던 그가 우리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리더의 정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