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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억의 경제학, '쪽수'로 먹고살던 시대 끝났다

중앙일보

입력

한국이 추석과 설 명절을 중시하듯 중국은 우리의 설에 해당하는 춘절을 최대의 명절로 친다. 나라가 넓다보니 세시마다 돌아오는 명절을 다 쇠는 게 아니라 이동 시간을 고려해 춘절에 몰아서 연휴를 즐긴다.

도시로 유입된 저임노동력이 고속성장 바탕 #임금상승과 노령화로 '인구보너스' 고갈 눈앞

길게는 3주 이상 이어지는 경우도 적잖다. 추석 명절이 끝나면 우리는 가족을 이끌고 귀성길에 오르지만 중국의 노동자들은 사정이 다르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소개한 노동자 사연을 들어보자.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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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농민공은 춘절이 끝나면 아이들을 남겨두고 도시의 공장으로 떠난다. 광둥성 둥관(東莞)시의 ‘골든컵 프린팅’ 공장에서 일하는 장슈링도 이런 농민공이다. 그녀의 고향은 허난성이다. 다음 춘절 때까지는 아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일자리가 있는 남부 광둥성으로 가야 한다. 그녀의 심경은 어떨까.

“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해야 한다.”

그녀가 도시에서 벌어 고향에 부치는 돈은 부모와 아이들을 지탱하는 힘이다. 춘절 연휴가 막바지에 달하면 안타깝지만 고향을 뒤로 하고 일터로 떠나는 발길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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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광둥성 공장에서 아들과 한 달을 함께 보냈다. 회사가 농민공 자녀 50명을 초청해 시범적으로 여름방학 특별캠프를 운영했다. 아들은 회사가 제공한 기숙사에서 엄마와 함께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특별한 체험이었다.

 [사진 인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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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슈링은 “심지어 춘절 연휴 때에도 아들과 열흘 정도만 함께 있었는데 올해는 한 달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장슈링처럼 농민공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보육 시범사업을 소개했다.

2016년 광둥성의 몇몇 공장에서 시작해 점점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프로그램으로 농민공들이 자녀 양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데 착안해 시행됐다. 국제장난감산업협의회(ICTI)가 '윤리적 장난감 프로그램'의 하나로 실행하는 사업이다. 18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작해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고 한다.

미국 디즈니 마블 등에 인형을 납품하는 봉제업체 관계자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작은 투자로 거두는 게 많다”고 설명했다.

여름방학 보육·탁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부터 농민공들이 일에 더욱 적극적이며 일부 농민공들은 자신들의 친구나 가족이 자신의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추천하기도 한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춘절 연휴 때 귀향한 농민공이 공장에 복귀하지 않아 인력 부족 사태가 고질병이 되자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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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중국의 2015년 인구 센서스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약 6900만명에 달하는 농민공의 자녀가 부모와 떨어진 채 농촌 지역에 조부모나 친척 등과 살고 있다.

농민공의 임금은 2004년 최저임금제 도입 이후 해마다 10%안팎씩 오르고 있지만 농촌의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향상되고 어린 자녀 양육 문제 등으로 농민공 특히 여성 인력의 공백 사태는 매년 반복되곤 했다.

한마디로 임금노동을 하기 위해 도시로 이동하는 기회비용이 증가해 춘절이 끝날 때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놓고 고민하는 농민공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장슈링의 사례는 농민공의 자녀 케어까지 앞장설 정도로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국 제조업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경제학 용어 중에 ‘인구 보너스(Demographic Bonus)’라는 말이 있다. 

인구에 힘입은 성장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중국에선 도시의 생산 현장으로 농촌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됐다.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에 따른 저임금 체제가 유지되면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 그야말로 지천에 널린 노동력의 덕을 톡톡히 본 인구 보너스였다.

인구 보너스는 노동가능인구가 증가하면서 1인당 피부양자를 부양해야 할 부담이 줄어듦에 따라 저축률 또는 투자율이 늘어나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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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난 30년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 노동가능인구(15~64세) 증가를 경제성장으로 연결하는데 대체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주의 교육시스템을 통해 젊은 인구에 최소한의 초등ㆍ중등 교육을 제공했고 고등 교육을 강화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인적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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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개혁개방을 본격화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2001년 WTO 가입 이후 폭발적으로 고용이 증가했다. 교육과 고용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실업률 증가로 경제의 주름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중국은 인구 보너스를 즐길 정도의 균형은 유지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2011년을 정점으로 총인구에서 노동가능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아래 그래프를 보자. 주력 노동그룹을 보여주는 파란색 선은 최고점을 찍고 하향곡선을 타고 있다. 반면 노년 인구는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사진 봉황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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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장률을 견인했던 저축률이 꺾이는 등 인구 보너스의 밑천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ㆍ일본 못지 않게 저출산·노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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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 인구가 늘면 연금이나 의료비 등 지출이 늘어난다. 노동가능인구가 줄어드는 마당에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하다보면 성장은 둔화의 패턴에 갇힐 수 밖에 없다. 고도성장을 이끌어왔던 과거의 엔진으로는 더이상 미래를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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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슈링만 해도 아직은 비용 대비 수익이 크기 때문에 허난성을 떠나 멀리 광둥성까지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세대다. 하지만 장슈링의 아들 세대가 생산 일선에 뛰어들 나이가 됐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손에 기름 묻혀가며 힘들게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시진핑 정권은 시간과 싸우고 있다. 

노동집약 산업에서 기술ㆍ자본집약적인 산업으로 체질을 전환하려면 우여곡절이 따르는 이행기간이 필요하다. 이런 마당에 미국과 무역전쟁으로 기회비용이 늘어나는 현실은 버겁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장슈링의 아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설 시간은 이제 몇 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이나랩 정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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