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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문화」에서 「자제문화」의 해로|송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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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는 80년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한해. 이 한해 우리가 꼭 다지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만일 그것이 현재 이 상태, 이 지경으로 지속되어 90년대도 그대로 연속될 경우 90년대는 대망의 90년대가 아니라 절망과 좌절의 90년대가 될 것이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도덕성의 회복이다. 우리는 지난 한해 보았듯이, 더 돌이켜서는 80년대 내가 사실상 다그러했듯이 한풀이 욕구풀이 하다가 이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는 줄 깨닫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비리를 파헤친다고 소리소리 지르다 이 도덕성이 깨어지는지 부서지는지 아예 지각조차도 못했고, 사회적으로는 제몫 찾기 제것 지키기에 아귀다툼하느라 정작 찾고 지켜야할 것에는 온통 눈이 멀어 있었다.

<한풀이로 자제력 상실>
으례 도덕성하면 구년 묵은 소리라고 코웃음칠 만큼 지금도 냉소적이 돼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도덕성이 아닌가. 그토록 우리는 도덕성에 무감각해 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이 도덕성의 기반이 되는 자제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 80년대의 우리는 조심스런 자제보다는 무슨「풀이」든 풀이하는데 더 급급했고, 금욕보다는 분출하는데 더 혈안이 됐으며 극기보다는 방종 하는데 더 적극적이었다. 풀이든, 분출이든, 방종이든 일정한도에서 자체할 줄 모르는 것이 현재의 우리가 돼있다.
더구나 다가오는 90년대는 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세찬 속도로 다원화사회로 들어가게 된다.
다원화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에 「센터」가 수없이 많이 나타나는데 있다. 농업사회에서나 전체주의사회에서 보듯이 중앙이 하나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그 중앙의 명령에 따라 질서를 지켜가기만 하면 되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중앙, 즉 명령의 주체가 수없이 많고 정부는 한낱 그 수없이 많은 명령의 주체들 사이를 조정해 주는 구실만 하는 그러한 사회가 다원화사회다.
명령의 주체들이 많은 것만큼 정부가 아무리 조정에 능해도 갈등이 많고 적나라한 싸움이 많은 것이 또한 이 다원화사회의 한 모습이다. 이러한 다원화사회에 우리는 현재 들어서고 있고,90년대는 아마 미국이나 유럽사회에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중앙이 많은 사회」가 될 것이다.
좋은 의미에 있어 이 다원화사회의 또 하나 가장 큰 특징은 사회내 각 하위부문들의 자율성이다. 현재 우리사회 내 어디를 가나 자율을 부르짖고 있고 이 자율을 외치지 않는 단체나 조직은 모두 어용이 돼있다.
이 자율을 부르짖고 어용을 규탄하는 그만큼 현재 우리는 이 다원화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자율을 향유하고 그 향유의 수준을 고양시켜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 해답이 바로 도덕성의 회복이다.
자율성의 기초는 자제 한번 곰곰 따져보자. 대학이든 언론이든 기업이든 노조든 정당이든 심지어 종교기관이든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만큼의 자율-사실은 자율인지 방종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그 원시적 수준의 자율에서 자율다운 자율로 그 자율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전제조건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냉정한 자기성찰의 자율-욕구의 분출을 가능한 억제할 줄 아는 자제가 될 것이다.
더구나 사고며 가치며 생활방식이 이질적인 만큼 다양하게 나누어져있는 다원화사회에서 자제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어느 조직이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회 전체적으로는 갈등을 첨예화시켜 분열과 해체를 가져오고 마침내는 사회 전체의 통합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 사회가 통합의 위기를 맞을 때 그 다음 필연코 오는 것은 권위주의·군사주의의 팽배며 그나마 획득한 자율의 상실이다.
우리는 작년 한해 사회 거의 모든 부문에서 자제력의 수위를 너무 많이 상실해 그 소리소리 외치던 자율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비도덕적 행위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노조가 자기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다. 그러나 그 노조의 파업으로 철도가 서고 지하철도 서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것은 정당한 권리 이전에 먼저 여서는 안 되는 비도덕적 행위다. 지난 연말에는 정보사회의 중추신경이 되는 중앙 컴퓨터시스템이 폐쇄되는 것도 경험했다.
주요연구기관 역시 얼마든지 파업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중추신경의 회로를 닫아 버릴 만큼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연구자 이전에 한 사회성원으로서 가책되어야 마땅할 비도덕적 행위다.
대학 역시 젊은이의 광장이다. 그들 역시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고 또 그 주장을 관철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관철을 위해 입시업무 등 학사업무를 마비시켜버리는 것은 감히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는 배움을 완전히 버리는 행위다.
더 큰 부도덕한 행위를 작년 말 우리는 국회 청문회에서 보았다. 청문회가 민주화로 가는 길을 닦는다는 점에선 그 기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국민의 대표자라는 사람들이 증인에게 마구 뱉어낸 그 선별력을 잃어버린 용어들, 자제할 줄 모르고 통제할 줄 모르는 침착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저질스런 언어들, 마치 앙팡테리블 들처럼 방만하게 쏟아내는 그 욕구풀이 한풀이의 행위는 우리사회 도덕성의 위기를 끝간데까지 몰아다주었다.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교육자들이 모여 교장임기 제 등 교육제도 개혁은 얼마든지 주장하고 관철하는 항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일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노동3권을 부르짖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파업에 준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가르치는 것은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사도는 노동자나 사용자가 가질 수 없는, 그 훨씬 외에 있는 권위다. 종교계라고 예외 일 수는 없다.

<도덕성 회복이 급선무>
의인지 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큰 교당 짓기와 큰 군집 모으기 행위들을 우리는 종교기관에서 비일비재하게 본다.
오늘날 미국의 위기는 도덕성의 위기다. 전후 세계GNP의 45%를 점유하던 미국이 오늘날은 빚더미의 미국이 돼있다. 과학기술자보다는 변호사를 훨씬 많이 배출해낼 만큼 생산보다 소송이 우위가 돼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 미국에 도덕성 재건의 소리가 얼마나 높아 있는가.
우리는 90년대 채권국으로 부상하느냐, 아니면 80년대의 그 어느 해처럼 세계 유수한 외채 대국으로 떨어지느냐, 더 나아가 올림픽에서처럼 장엄한 민족적 성취를 내보인 세계사의 주요세력이 되느냐, 아니면 성공을 앞두고 용에서 벌레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보느냐는 이 도덕성의 회복에 달렸다.
1989년-. 작년한해가 「풀이」문화의 절정이었다면 올 한해는 「자제」문화의 정립해로 이 한해를 만들자. <연세대교수 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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