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조국의 벚나무와 외할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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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교생이던 1966년 여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는 길에 논산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당시 논산에는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논이 펼쳐진 평탄한 대지 위에 일본풍의 멋진 기와집이 서 있었다. 일제시대 일본인 지주가 살던 집이었다. 그 주위의 작은 초가집들 중 한 곳에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체구가 조그마한 외할머니와 검게 탄 얼굴에 말이 없는 여자 일꾼 등 세 식구였다. 여자 일꾼은 1년간 일한 대가로 추수철에 겨우 벼 한 가마니를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외할아버지의 집에는 여윈 돼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귀에 커다란 종기가 나 있었다. 나의 형이 수의사한테 가 보라고 충고했지만 외할아버지는 "돼지를 의사한테 보이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며 웃어넘기셨다. 얼마 뒤 돼지는 죽고 말았다. 논산의 밭에서는 짐을 산처럼 쌓은 수레를 끄는 자그마한 조선 토종말도 봤다. 등짝이 무거운 멍에에 쓸리다 못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대낮부터 화투 놀이에 빠져 살던 농부들의 눈은 충혈돼 새빨갰다. 이것이 내가 처음 본 조국의 맨얼굴이었다.

외할아버지 집 근처 약간 높은 언덕에 기묘한 불상이 서 있었다. 하루는 내가 고열에 시달리다 잠에 취해 버렸다. 외할머니는 집에 간직해 둔 키니네를 꺼내 내게 먹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안타까움이 실린 고목 같은 손으로 내 몸을 쓰다듬어 주셨다. 열에 들뜬 와중에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불상의 눈길과 나의 눈길이 정면으로 마주쳐 버린 것이다. 불상의 표정은 얼핏 유머러스했지만, 자세히 보니 냉담한 체념이 담긴 듯이 보이기도 했다.

불상은 이제 생각해 보니 관촉사의 미륵보살 입상이었다. 나는 H에게 부탁해 함께 관촉사를 찾아갔다. 미륵보살은 고려시대인 1006년 완성됐으니, 정확히 1000년 동안 벌판에서 일어나는 중생들의 희비극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20년대, 이곳에 살던 한 젊은 농민이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동원돼 신작로 공사장으로 내몰렸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이대로는 처자식조차 먹여 살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지급받은 곡괭이를 처가 안마당에 던져 놓고 그 길로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는 일본 교토시 교외의 큰 농가에 머슴으로 들어간 뒤 고향의 처자식을 어렵게 일본에 불러들였다. 그가 나의 외할아버지다. 외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재일 조선인도 없었을 터이다. 해방 뒤 외할아버지는 고향 논산으로 돌아갔다. 일본에 남은 친척이 송금해 준 돈으로 약간의 농지를 샀고, 한때는 부자 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이리저리 손해만 보다가 인생을 마쳤다.

관촉사가 있는 언덕에서 논산 벌판을 둘러봤다. 딸기농원의 비닐하우스가 널려 있을 뿐 외할아버지의 집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논산은 40년 전에 본, 가난하고 상처투성이였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늙은 벚나무는 어쩌면 20년대 신작로 공사 때 외할아버지가 심었던 나무일지도 모른다. '벚나무 아래엔 시체가 묻혀 있다'고 어떤 작가는 썼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앞에 핀 꽃의 아름다움은 사랑하지만 그 뿌리에 묻혀 있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논산에서 공주를 거쳐 대전으로 돌아올 때 반대 방향 차로에는 자동차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현대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