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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정신은 상대 존중 … 사무라이 정신과 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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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이종림 대한검도회장은 ’세계선수권을 역대 최고 대회로 치를 준비가 됐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 원성검도관에서 진검을 들고 포즈를 취한 이 회장. [최승식 기자]

이종림 대한검도회장은 ’세계선수권을 역대 최고 대회로 치를 준비가 됐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 원성검도관에서 진검을 들고 포즈를 취한 이 회장. [최승식 기자]

197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4강전.

세계선수권 앞둔 이종림 검도회장 #45년 전 오심으로 동메달 아쉬움 #일본 유리한 심판배정 방식 고쳐 #세계화 되면 종주국 영향력 줄어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에도 앞장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출전한 34세의 청년 이종림은 일본 선수와 맞붙은 준결승전에서 안타까운 패배를 당했다. 경기 종료 직전 상대의 손목을 정확히 타격했는데, 일본인 심판은 외려 반 박자 늦게 머리를 노려 반격한 상대 선수의 득점을 인정했다. 오심 논란으로 경기가 5분 가까이 중단됐고, 심판을 비난하는 관중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끝내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한국 검도 역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에서 메달을 획득(동메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이종림은 활짝 웃지 못했다. 그는 그때 ‘공정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가리는 시스템을 반드시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45년이 지난 2018년. 청년은 팔순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신사가 됐다. 직함은 대한검도회장 겸 국제검도연맹(FIK) 부회장. 검도인들 사이에서 ‘입신(入神)의 경지’로 존경 받는 범사(範士) 8단 보유자이기도 하다.

지난 10일 서울 구로구 원성 검도관에서 만난 이종림(79) 대한검도회장은 “45년 전 막연하게 가슴에 품었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고 했다. 14일부터 사흘간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열리는 제17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는 해묵은 판정 공정성 시비를 해소할 무대로 주목받는다. 지난 1988년 이후 30년 만에 국내에서 치러지는 이번 대회에는 전 세계 56개국에서 1200여 명의 선수와 임원진이 참가한다. 역대 최대 규모다.

이 회장은 “세계선수권대회를 국내에 유치한 뒤 특정 국가나 선수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판정 시스템을 고치는 작업에 주력했다”면서 “이제까지는 주로 일본인 고단자들 위주로 구성된 주임 심판진이 심판 배정을 전담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본선 토너먼트에 한해 심판배정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하고, 이들이 추첨을 통해 심판진을 구성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홈 어드밴티지도, 특정 국가에 대한 불이익도 원치 않는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가 실력에 걸맞은 결과를 얻게 하는 게 새 시스템의 목표”라고 덧붙였다.

지난 48년간 이어온 경기 진행 방식에 ‘메스’를 대려는 이 회장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검도계 인사도 적잖았다. 하지만 “이 방향이 올바른 길”이라며 적극적으로 움직인 이 회장의 설득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른바 ‘이종림식’ 심판 배정 방식에 대한 승인 여부를 심의한 FIK 이사회 표결에서 찬성 14표로 반대(4표)를 압도했다. 이 회장은 “FIK 이사 중 일본인 멤버가 4명이다. 다수의 이사가 변화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결과”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대한민국 검도계의 수장이면서도 앞장서서 “기득권을 내려놓자”고 외친다. 검도를 올림픽 정식 종목군에 포함하기 위해 앞장서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내려놓기’에 포함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회장은 검도계가 올림픽 참가에 소극적인 이유에 대해 ‘변화를 원치 않는 소수의 목소리가 우선적으로 정책에 반영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태권도, 유도 등 올림픽을 발판 삼아 세계화·대중화에 성공한 무도 종목의 경우 정작 종주국의 영향력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자 ‘검도계 권력자’들이 올림픽 종목이 되는 걸 꺼린다는 뜻이다.

이 회장은 “검도가 올림픽 종목군에 포함되면 소수 인물이 수십 년 째 권력을 독점하는 폐쇄적인 구조를 바꾸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 세계에서 칼을 쓰지 않는 민족은 없다. 검도의 올림픽 등재를 추진하면서 세계 각국의 고유한 검법을 받아들여 종목 자체의 경쟁력과 다양성을 높이면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무도로 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종림 회장이 생각하는 ‘검도 정신’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일본 검도인 중에는 ‘검도 정신’과 ‘사무라이 정신’을 유의어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며 “현대 검도의 기초를 확립한 건 일본이 맞지만, 뿌리는 삼국시대 한국과 중국의 ‘격검(擊劍)’에서 찾을 수 있다. 한·중·일 삼국의 검술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며, 이것이 검도 정신의 출발점”이라 강조했다.

이 회장이 대학생 시절 모교(성균관대) 인근에 출몰하던 ‘정치 깡패’ 잔당들을 목검으로 제압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이야기를 꺼내자 이 회장은 “혈기왕성하던 청년 이종림은 사라졌지만,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철학은 건재하다”면서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이겨야(克己) 진정한 승자로 인정받는 검도의 아름다운 전통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물려주는 게 나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밝혔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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