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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 불가의 한 표 … 블록체인 민주주의 꿈꾸는 한국 정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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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호 02면

[SPECIAL REPORT] 블록체인 열공하는 정치권

결핍은 혁신의 동력이다. 정치의 이상향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이다. 조직은 수평적이고,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으며, 소수의 의사 표현도 존중받았다. 현대판 아고라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정치 실험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지금, 정치는 블록체인에 빠졌다. 블록체인 위에 건설될 아고라 광장을 꿈꾼다.

현실론 #정병국·추경호 등 매주 토론회 #“불법 여부 가릴 법부터 만들자” #실용론 #박원순·원희룡 “일자리 위해서” #스위스 추크 같은 특구 도입 추진 #이상론 #김민석·남경필·나경원 등 관심 #“신기술 통해 후원금·공천 개혁”

기술 발달은 사회 변화를 추동한다. 2000년대 초 인터넷 붐이 일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특성이 21세기판 아고라 광장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2007년 독일의 해적당이 대표적이다. 정당의 모든 안건을 전 당원이 직접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다. 대의 민주주의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대표나 운영진 선거 때 의사 표시를 하고 나면 다음번 선거가 있을 때까지 의사를 전달할 통로가 없다. 민주주의는 고체처럼 경직돼서는 안 된다. 액체처럼 유동적이어야 한다. 이른바 ‘리퀴드 민주주의’다.

취지는 좋았다. 문제는 인터넷 기반의 투표 시스템이라는 한계다. 인터넷상에서 신원의 위변조는 너무 쉬운 일이다. 해킹을 통해 온라인 투표 결과를 바꿔 버릴 수 있다. 당원들의 정확한 의사 표현을 묻겠다는 투표 행위가 되레 여론 조작의 도구가 돼 버렸다. 해적당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기술의 진보는 소멸해 가던 리퀴드 민주주의를 다시 현실 정치로 소환했다.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집중형 단일 서버에 기록을 보관하지 않는다. 수많은 컴퓨터에 동시에 데이터를 분산 저장한다. 몰래 기록을 위변조하고 싶으면 수많은 컴퓨터를 동시에 고쳐야 한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스마트 계약을 통해 정당의 모든 안건을 투표에 부칠 수 있다. 당원의 의사 표현은 상시적으로 가능하다. 해적당이 실패했던 리퀴드 민주주의의 부활이다.

호주의 블록체인 기반 정당인 플럭스(Flux)가 대표적이다. 2016년 등장했다. 모든 당원이 정책마다 한 표를 행사한다. 플럭스에 소속된 정치인은 당원들이 이렇게 투표로 결정한 것을 철저히 대변하는 역할만 한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투표권을 양도할 수도 있게 만들어 ‘투표하지 않을 권리’까지 보장한다.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특별한 의견이 없다면 해당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당원들에게 투표권을 넘겨 이들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게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정치 시도가 실험에 그칠 것이라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스페인 좌파정당인 포데모스를 보면 성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포데모스는 블록체인 기반의 의사결정 구조를 도입해 군소 정당에서 원내 3당으로 약진했다. 블록체인 관련 기업인 블로코의 김종환 상임고문은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 나와 “블록체인의 탈중앙화, 절대적 신뢰성이라는 특징이 정당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정당 출현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국내 정치권에도 블록체인 바람이 일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풍이다. 연말 연초 암호화폐 시장이 투기판으로 변질되면서 암호화폐는 물론이고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여론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의도에서는 블록체인 ‘열공’ 움직임이 감지된다. 블록체인에 빠진 한국 정치의 현재를 짚어봤다.

현실론 : 입법으로 대동단결

최근 들어 거의 매주 국회에서는 블록체인 관련 토론회가 열린다. 주로 암호화폐 거래소 법제화 및 암호화폐공개(ICO) 합법화 등과 관련한 내용이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역설적으로 규제가 아예 없다는 점이다.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합법인지 불법인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암호화폐를 가장한 유사 코인 다단계 사기가 판을 친다. 동해에 빠진 전설의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인양하겠다며 코인을 팔아 수백억원을 챙긴다.

현실주의자는 최소 이런 폐해는 막기 위해 법을 만들자는 이들이다. 입법을 주장하는 만큼 대부분이 현직 국회의원이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암호화폐 관련 법률만 5건이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최장 1년 넘게 표류 중이다. 이달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부는 ‘일 좀 하는 국회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려고 시늉만 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한 암호화폐 전문가는 “국회의원은 철저히 표에 따라 움직이는데, 암호화폐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다고 해서 표가 움직이지는 않는다”며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입법에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인센티브는 정치 후원금 문제다. 블록체인 기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스팀잇에 글을 쓰면 글에 대한 반응에 따라 돈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어떤 정치인이 글을 써서 뜨거운 반응을 얻어 100만원을 벌었다면 이건 정치 후원금일까 아닐까. 후원금이라면 스팀잇에 영수증을 끊어줘야 하나, 아니면 보팅(보상 결정 투표)한 당사자에게 줘야 하나. 그는 “정치인들이 스팀잇을 통해 후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암호화폐와 관련한 법안을 당장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용론 : 일자리가 지상과제

실용주의자는 주로 지방자치단체장이다. 이들은 일자리, 지역 경제 발전이라면 독이 든 성배도 삼킬 태세다. 일자리 창출은 이들에게는 지상 최대 과제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산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스위스 추크는 1인당 국민소득이 8만 달러를 웃돈다. 스위스 내 칸톤(자치구) 가운데 가장 높다. 크립토 밸리가 만들어진 덕이다. 진대제 블록체인협회장은 “추크 인구가 12만4000명인데, 기업이 3만4000개”라며 “국내에서 ICO를 금지한 탓에 스타트업은 울며 겨자먹기로 해외로 나가고, 우리는 그만큼 일자리 창출 기회를 잃게 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푸는 핵심인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가능케 하는 ICO를 금지하는 건 아이러니라는 게 진 회장의 설명이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실용주의자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다. 일부 언론은 그를 ‘블록체인과 사랑에 빠졌다’고까지 표현했다. 원 지사는 제주를 블록체인 특구로 지정해 한국판 크립토 밸리를 만들고 싶어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근 “연말에 블록체인 종합 마스터플랜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 때 공약으로 나온 지역화폐 ‘S코인’의 활용 방안도 이 플랜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실용주의자의 한계는 중앙 정부의 지원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ICO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 시장이 움직인다고 해서 서울에서 ICO가 합법화될 리는 없다.

그나마 특별자치도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제주는 상황이 낫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실험 차원에서 제주도 전체를 일종의 블록체인·암호화폐 규제 샌드박스로 지정할 수 있다. 다만 원 지사의 출신성분(?)이 문제다. 정부·여당 입장에서는 남의 당에 잠재적 대선후보를 만들어 주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상론 :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

시간의 잉여는 창조를 낳는다. 놀아야 딴 생각을 하고 큰 꿈을 꿀 수 있다. 블록체인을 통해 정치 혁신, 나아가 사회 변혁을 꿈꾸는 이들은 주로 노는(?) 사람들이다. 곧, 선거에서 떨어진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관련 공부를 하고, 전문가를 찾아가 고견을 듣고, 현장에서 뛰는 스타트업을 만나 머리의 곳간을 블록체인으로 채운다.

김민석 전 바른미래당 의원은 최근 블록체인 ‘도장깨기’에 나섰다. 업계에서 유명하다는 전문가를 찾아가 블록체인을 육성으로 공부한다.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는 최근 일본 도쿄대에서 블록체인 관련 공부를 했다. 조만간 미국 스탠퍼드대로 떠날 예정이다. 그는 “기초가 되는 엔지니어링부터 공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직에 있는 정치인 가운데서도 큰 꿈을 꾸는 이들이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블록체인을 활용한 정당 개혁을 준비 중이다. 그는 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산하 정당개혁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나 의원은 최근 “정당코인을 한국당에 도입해 후원금은 물론 정치 참여에 대한 페이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공천 등에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 의원의 구상이 혁신적으로 보이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현실이다. 텍사스주를 기반으로 지난 3월 창당한 인디당은 자체 발행한 암호화폐 ‘인디 토큰’을 매개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끌어내고 있다. 정치자금 1달러를 기부하면 ‘인디 지갑’에 토큰 20개를 주고, 1시간 자원봉사를 하면 150개 토큰을 주는 식이다.

이상주의자들의 꿈은 아직 숙성이 덜 됐다.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지방분권·참정권 확대와 직접 민주주의, 정당 민주주의 실현 등 정치개혁과 시대정신 구현을 할 수 있다는 밑그림 정도를 그리는 단계다. 그림이 완성되려면 한참 남았다. 이제 스케치는 끝내고 물감을 칠하는 단계에 와 있는 나 의원의 정당코인 발행은 지극히 보수적인 한국당 구성원의 합의가 전제돼야 가능하다.

암호화폐공개 (ICO, Initial Coin Offering)

암호화폐를 활용한 자금 조달 방법이다. 주식시장의 기업공개(IPO, Initial Public Offering)와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으로 투자금을 받고 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토큰을 투자자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이다. 거래소가 심사를 거쳐 IPO를 승인하는 것과 달리 ICO는 앞으로 이런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담은 백서만으로 투자금을 모으기 때문에 투자 리스크가 극도로 크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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