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내가 만든 북은 소리로 알죠"|고장 박균석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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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서고금을 통해 북이 없는 민족은 없다. 타악기의 기본이 북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역에 따라 형태가 다르고 재료의 차이가 현저하며 주법이 판이할 따름이다.
북은 독주할 만큼 섬세한 악기는 못되나 반주하기 위해서는 어느 경우든 빠질 수 없는 제구실을 한다.
무속의 굿에서도, 사찰의 사물이나 농악·아악 등에 두루 사용되는 것이 북이다. 우리 고유의 농악이 타악기 중심이지만 요즘 유행하는 사물놀이를 듣고 있노라면 용솟음치는 고동소리를 듣는 듯 하다. 쿵쿵쿵쿵 울림이 크다.

<"돈벌이는 안돼요">
금년에는 유독 북이 동났겠다고 하니 『웬 걸요. 매일반이구만요』라 한다. 근래 북의 수요가 급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데모꾼들이 인간문화재의 북을 사서 쓸 리 없는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63호 「북메우기」의 박균석옹(69)은 아무래도 기능보유자의 체통이 있지 시중의 헐한 물건들과 어찌 경쟁하겠느냐는 대답이다.
지난 올림픽때만 해도 그랬다. 직경 1m 50cm의 초대형으로 6개 만들지 않겠느냐는 주문이 들어왔을 때 경쟁입찰이라면 아예 기권하마고 사양했다. 외모만 갖춰 내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가죽을 다루는 기술이 공업화·기계화하는 현대일수록 전래의 수공업적인 솜씨의 소중함을 자칫 도외시하기 쉽다. 그걸 알아달라고 설명하기가 구차스러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 큰북을 너도나도 다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북의 시세가 새삼 제고된 것도 요 몇년사이의 일이다.
11세부터 60년 가까이 북을 만들어 온 박옹이지만 해방 직후만큼 북이 잘 팔린 적이 다시 없었다. 일제의 전쟁말기에 농악소리가 완전히 끊겼다가 해방되자 전국에서 부락마다 농악기 장만에 일제히 일을 올렸다.
저마다 마음문이 활짝 열리자 실컷 두드려서 한을 풀고 기쁨을 외치고자 했다. 그 무렵 한 달이면 줄북 1백개를 만들기 바빴다. 애들 두셋을 두고 일했지만 물건이 달려 못 팔 지경이었다.
『북이라는 게 그렇잖습디여. 사정이 넉넉찮은 서민상대의 물건이라서 돈벌이는 안돼요. 배운 기술이라곤 그거라서 천직 삼고 일하는 거지, 싼 것만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이지요. 문화재가 되니께 되려 인사만 극진했지 일거리가 더 많아지는 건 아니습디여.』
한민족의 북의 사용은 원시 제천의식에 소급되고 고구려 벽화만 보아도 중국 한당문화에 비견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경공장으로서는 겨우 군기사에 4명의 고장이 보일 뿐 장악원이나 지방관아에도 전혀 배치되지 않았다.
시골 부락에서 대개 자작해 사용했듯이 지방관청이나 병영에서조차 자급자족했을 듯 싶다.
아악에 소용되는 북은 18종(좌고·건고·용고·절고 등)이나 되지만 그것은 서울에 국한된 특수제품이다. 교방고니, 창북(소리북) 이니 하는 것도 흔하게 제작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민의 일반적인 북은 북통 양쪽의 가죽을 끈으로 꿰어 죄고 다시 그 중간에 다래덩굴 테를 끼워 쐐기 친 이른바 줄북이 역시 만들기 손쉽다. 물론 장고에 이르면 북과 달라서 훨씬 전문성을 띤다.
그래서 지방의 큰 도시에는 북을 만드는 가내수공의 공방이 한 두 집 있어 줄북·소리북·장고 등을 공급했고 그것을 유기전에서 맡아 판매했다. 하지만 영세한 공방사정임에도 위탁판매가 통례다.
전남 담양의 농촌 태생으로 조실부모한 박옹은 학교 다닐 처지도 못되어 당숙의 북공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노점상을 했다. 그러면서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 있다던 당숙의 칭찬을 되새기며 틈틈이 북을 만들었다. 종로통 유기전에 맡겨두면 그것도 궁한 대로 보탬이 됐다.

<용단청 자습해 익혀>
박옹이 서대문밖 무악동에 자리잡은 것이 그때의 일.
아직도 그는 그 집에서 사는데 다만 집 모양이 근년에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그나마 지켜왔노라고 자부한다.
소년시절에 심부름하며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을까. 한글과 한문도 자습으로 익히고 혼자서 북을 만들며 많은 궁리를 해냈다. 북통의 용그림도 스스로 모방해서 터득한 단청솜씨다.
정작 고장이 돼보겠다는 결심은 30년전 국립국악원의 강상기씨를 만나고서였다. 강씨는 북 제작에 관해 아는 바 없었지만 악기장이였으므로 악가제작에 가르침을 주었고, 특히 그로 말미암아 국악원 진열용과 서울대 음대 비치용 북을 모두 만들게 해주었다. 기량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 비로소 박옹은 『악학궤범』을 보았고 궁중악기에 관해 어림짐작 하게됐다. 『북 잘 만드는 비결이랄 게 따로 있잤읍디여. 그게 오랜 경험으로 깨우치는 것이지, 말로 설명 안되지요. 젖은 가죽을 밟아가며 죄고 망치로 때려가며 소리 조절을 하는 것인데 그거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눌러보아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숫자로 계산되는 게 아니지요.』
수제품 악기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동서가 마찬가지다.
섬세하고 화려한 악기만이 아닐 듯 싶다. 비록 단순하고 걸쭉한 북소리일 망정 제작상 민감하기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박옹은 아무리 헐었더라도 자기 제품만은 식별된다고 했다. 북소리를 들어보면 가죽 다룬 솜씨가 어느 정도 감지된다고 했다.
북 만드는 가죽은 4∼5년생 황소. 암소는 가죽이 얇고 작은 편이다.
그 가죽의 부위에 따라 엉덩이 가죽은 질긴 반면에 소리가 딱딱해 정악용으로 이용하고 목 가죽은 두껍고 저음이어서 소리북에 알맞다. 배 가죽은 연한 편인데다 고음이어서 승무북에 흔히 쓰이고 개가죽 대신 장고에도 댄다. 그런데 북을 메울 때 과도하게 늘여 붙이면 가죽에 무리가 가서 상하기 쉽고 소리도 높게 마련.
반면에 긴장도가 부족하다 싶으면 그 당장엔 소리가 부드럽지만 날씨가 궂을 때 벙어리가 돼 버린다.

<한우가죽만 골라 써>
매일 두드려대는 북이 아니라면 몇 십년 좋이 간수하는 물건이다. 좋은 북을 찾는 고객이란 늘 다시 찾는 법인데 요즘 들어 『과거 것만 못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했다. 왜 그럴까.
옛날처럼 석회로 기름기를 검어내어 무두질하고 닭똥을 쓸 때도 여러 날 조심해서 유피처리함에도 왜 소리에 이상이 생긴 것일까.
반드시 한우가죽만 골라 쓰지만 소 자체가 전만 같지 못한 까닭이라고 했다. 요즘처럼 놀고 먹는 소는 가죽에까지 체질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각궁장이 근래 쇠심이 맥풀려 탄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듯 소가죽에도 긴장이 풀린 탓일까.
좋은 북 만드는 비결은 가죽 다루는 솜씨에 달려 있다. 일반적인 소리북에 있어 홍송이나 피나무·오동나무의 북통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한번은 드럼통을 손쉽게 북통으로 시험해본 적이 있었다. 양악기를 가상했던 것인데 전혀 울림이 없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국의 북은 한국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 북통은 통나무보다 쪽판을 붙여 만드는 것이 튼튼하고, 오동나무 장고에는 가죽이 얇아야만 서로 공명의 효과가 있다. 곧 가죽과 통의 울림이 서로 받아들여 어우러짐이다.
기계화한 양산체제의 시대일수록 숙련된 감각이 더욱 절실하게 마련. 젊은 후계자들에게 그걸 이해시키려 해도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아 박옹은 안타까와한다.
고역스럽더라도 전래의 무두질의 장점을 이해하지 않고는 가죽이 머금고 있는 적당한 기름기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고역을 감내하기는 커녕 되도록 쉽게 해치우려는 생각이 못마땅하지만 스스로 각성해 준다면 모르되 시대가 자꾸 변하는 걸 어쩌겠느냐고 체념한다.
글 이종석(중앙일보 호암갤러리 관장,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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