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이언제언」의 5공 언론 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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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2일의 국화문공위청문회는 이날 증인으로 나온 5공 언론정책의 주도자나 그 정책의 피해자 모두가 언론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언제언」의 5공화국 언론정책을 단적으로 드러낸 좋은 본보기였다.
그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날 청문회 때 나온 현직 언론인 및 해직언론인에 의해 5공화국당시 언론의 온갖 치부가 노출돼 「5공 언론」을 장사 지냄으로써 우리 언론으로서는 심각한 자성의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날 청문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피해언론인의 증언을 통해 기존언론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데만 주력한 나머지 당시 언론정책 주도자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데는 부실한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 의원들은 지난 2차례의 청문회를 통해 당시 주도자들의 비합법성과 부도덕성을 충분히 밝혀냈다고 판단했음인지 새로운 사실의 발굴보다는 증인들에 대한 「확인사살」적 성격을 뛰어넘지 못하는 아쉬움도 남겼다.
또 불러온 증인을 앉혀놓고 의원들이 비디오테이프 방영문제로 정회를 거듭하면서 3시간 가까이 허비한 것은 언론의 책임을 소리높이 강조한 발언과는 좋은 대조가 되기도 했다.
김주산 씨 등 『말』지 사건관련자 3명의 증언을 들으면서부터 시작된 청문회는 대체로 보도지침의 작성 및 전달 경위와 홍보조정실의 설치 및 역할문제에 초점이 모아졌다.
특히 야당의원들은 이들 문제가 권력 출범기에 자행된 언론인 대량해직·언론 통폐합과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계엄해제 후에도 언론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의 도구로 활용키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에 주력했다.
그러나 앞서의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당시 언론정책을 담당했던 증인들은 보도지침은 협조사항이었을 뿐이었고 홍보조정실의 설치는 청와대 결정사항이었다는 말로 이를 부인하거나 떠넘기고 나섰고 이를 야당의원들이 다시 뒤집지 못해 일치된 증언으로서의 확인성과는 별로 없었다.
먼저 보도지침 문제에 대해 『말』지 사건관련자인 김주산 증인은『청와대·안기부 등이 협의해 보도지침을 작성하고 문공부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 편집국장 및 각부서장에게 전달됐다』며 시공도지침의 내용은 구체적 사안에 대해 취급여부·기사크기·제목·사진 크기 등을 간섭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이 같은 보도지침은 유선이나 개별접촉을 통해 전달됐고 문공부 홍보조정실외에 각 정보기관원들도 언론사에 매일 드나들며 기사에 일일이 간섭했고 기관원수가 많을 때는 7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나 김주산 증인이 한 연구원의 조사를 인용, 이감은 보도지침의 70∼80%가 이행됐다고 주장했으나 민정당의 손주환 의원에 의해 「전 대통령의 축하전화 1면 톱」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상당수의 주문들이 언론사에 의해 아예 지켜지지 않았거나 극히 일부분만이 반영됐음도 아울러 입증됐다.
따라서 보도지침에 대한 언론계 내부의 저항에 대해서 조명하는 노력이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 등 정치문제와 학원문제 등에 있어서는 압력에 의해 기사내용이나 제목 등이 바뀐 적이 많았던 것은 충분히 이해됐다.
이에 대해 이광표·이원홍·이진희 씨 등 역대 문공 장관들은 보도 지침이란 것은 특수하게 제작된 정부의 지휘 문서라기보다 정부가 언론에 대해 정부의 생각과 협조를 요청하는 사안의 내용이란 말로 강제성이 없었음을 강변했다.
허문도씨도 앞서의 김주산 씨가 청와대 정무 수석실에서 보도지침이 내려왔다고 증언한 것에 대해 『문공부가 협조를 구할 사항을 정리했고 청와대는 필요한 것을 추가하는 식으로 했으며 필요할 때는 전화로 얘기했다』면서 청와대는 소극적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 뒤 역시 보도지침은 협조사항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표 씨의 경우는 보도지침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해당기자를 연행해 고초를 준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보복적으로 그렇게 한일은 없다』며 제한적으로나마 역설적으로 강제성이 있었음을 간접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한편 이날 박석무 의원(평민)이 자료로 제시한 「시국대처를 위한 방송 안」은 6·29이후에도 사실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홍보조정을 했다는 것을 사실상 입증하는 것이었고 김주산 증인도 지난 국정감사 때 국회문공위가입수한 언론인 접촉일지를 통해6·29이후의 홍보조정을 직접 확인했다고 주장해 이 문제에 대한 불씨는 그대로 남아있게 됐다.
다음으로 홍보조정실 문제에 대해 야당의원들은 홍조실이 계엄이 해제되면서 그 동안 보안사 언론검열 단이 맡았던 기능을 대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란 쪽으로 몰아가려 했다.
또 이철 의원(무소속) 의 경우는 「해엄 후의 언론상황과 언론조정」이란 문서를 공개해 당시 전대통령이 문공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국내언론 문제는 앞으로 문공부가 전담하고 중정이 이를 측면지원 하라며 기사화 할 것은 하고, 안 할 것은 안 해야 한다고 지시한 내용을 들어 이 같은 주장을 문서상으로 뒷받침했다.
당시 문공 장관이었던 이광표 씨는 『홍조실은 청와대 비서실이 대통령의 허가를 얻어 구상한 것』이라며 『그 주도자가 청와대 비서실의 허문도 씨인지, 이수정 씨였는지는 분명치 않다』면서도 『그러나 당시 배경은 언론창구를 일원화하기 위한 전담 부서였다』고 인정했다.
이날 언론정책 담당자들로부터 새로 밝혀낸 사실이 있다면 허씨의 증언을 통해 언기법 제정에 대해 『법정비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수정 씨가 했으며 문공부에서 초안을 만들고 이를 이씨가 평소 갈 알던 박용상 판사를 불러 이 문제를 검토했다』는 정도였다.
이날 청문회는 5공 언론탄압정책의 실상을 심도 있게 파헤치기보다는 피해언론인의 제도언론에 대한 공격에 치중한 느낌이고 야당도 이에 들러리 서준 정도이상의 역할을 못해냈다.
청문회에 나온 해직언론인 인 신홍범 씨 등은 제도언론 탄생 계기를 75년 조선·동아투위 사건이라고 지적, 문제삼았는데 기존언론은 이감은 오해를 씻어야하는 숙제를 안게됐다.
동시에 언론내부에 나타난 상호 갈등과 비판적 시각의 문제도 남겼다. <이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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