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규제혁신 1호 법안 불발…盧 '이라크 파병 악몽' 재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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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민주당 홍영표(왼쪽), 자유한국당 김성태(가운데),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가 30일 국회 정론관에서 본회의에 상정하려던 쟁점법안 합의에 실패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왼쪽), 자유한국당 김성태(가운데),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가 30일 국회 정론관에서 본회의에 상정하려던 쟁점법안 합의에 실패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8월 임시국회에서 민생ㆍ개혁 입법이 전부 무산된 배경의 핵심에는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을 둘러싼 여당 내 갈등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뒤집어 지난 7일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은산분리 규제 완화 필요성을 언급한 직후부터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반발했다. 20일 열린 국회에서 민주당 정책 의원총회(의총)에서 박용진ㆍ제윤경 의원 등은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가 될 것”이라며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박영선 의원은 산업자본의 인터넷전문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25%로 하는 법안을 따로 발의했다. 지도부가 한도를 34%로 하는 여당 안(案)을 만들었는데, 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29일 열린 정책 의총에서도 반대 목소리는 여전했다.

대통령의 ‘규제혁신 1호 법안’이 여당 내 갈등으로 흔들리자 다른 민생ㆍ개혁 법안의 대(對) 야당 협상력도 떨어졌다.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을 심사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정재호 의원은 30일 “오늘 여야 원내대표 협상때까지도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은 야당과 협상할 여당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라고 말했다. 산업융합촉진법ㆍ정보통신융합법은 해당 상임위에서 이미 합의를 끝냈고,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여야가 큰 틀에서 합의했지만, 여야가 8월 임시국회 전에 “패키지로 일괄 처리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전부 처리되지 않았다. 이로써 8월 임시국회의 민생ㆍ개혁 입법 성적은 ‘0점’이 됐다.

더불어 민주당 의원총회가 29일 오후 국회에서 비공개로 열렸다. 임현동 기자

더불어 민주당 의원총회가 29일 오후 국회에서 비공개로 열렸다. 임현동 기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민생ㆍ개혁 법안 처리를 당부했는데 여당 내 이견 때문에 법안 처리가 실패했기 때문에 후폭풍은 클 수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3축 중 하나인 혁신 성장이 시작부터 발목 잡힌 꼴이 됐다. 또 이번 당내 갈등이 계파 갈등으로 번질 우려도 있다.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반대한 박영선ㆍ박용진ㆍ제윤경 의원은 모두 비문재인계다.

여권 인사들에겐 이번 사태가 ‘열린우리당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기존 공약이나 입장을 바꾼 정책을 펼쳤다가 여당 반발에 부딪히는 바람에 국정 장악력을 잃게 됐고, 결국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했는데,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초ㆍ재선 강경파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파병하는 것으로 결론 났지만 당내 일부 지지층과 진보ㆍ개혁 세력이 등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했다. 이에 진보 시민단체의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은 단식투쟁까지 했다. 결국 한ㆍ미 FTA는 무산됐고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과의 불화 끝에 탈당했다.

2007년 청운동 청운동사무소앞 네거리 청와대진입로에서 한ㆍ미FTA협상 타결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일방적 퍼주기협상 한미FTA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하며 ’노무현 탄핵하자“는 구호 등을 외친 후 청와대로 행진하려하자 전경들이 막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청운동 청운동사무소앞 네거리 청와대진입로에서 한ㆍ미FTA협상 타결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일방적 퍼주기협상 한미FTA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하며 ’노무현 탄핵하자“는 구호 등을 외친 후 청와대로 행진하려하자 전경들이 막고 있다. [중앙포토]

민주당은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모습이다. 29일 정책 의총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당내 갈등이 바깥으로 노출되는 것은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였다. 박경미 원내대변인은 의총 뒤 브리핑에서 “발언자 중 찬성과 반대가 4대 4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약 4시간 뒤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기사에서 찬반을 5대 3으로 수정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9월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에서 민주당 지도부가 얼마나 빨리, 많은 개혁 입법을 성공시키느냐에 따라 ‘열린우리당 트라우마’가 문재인 정부에서도 반복될지가 결정될 전망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사실 당 지지층의 견해와는 거꾸로 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보다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는데 청와대가 당 안팎의 반대 기류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같다”며 “당내 의원들은 물론이고 외곽단체들을 상대로 보다 적극적인 설득·홍보 활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윤성민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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