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선

또 하나의 정치가 된 법원의 깜깜이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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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법원이 정치영역에 제 발로 들어갔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전임인 양승태 체제와는 성분이 조금 다른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진행 중이다. 저녁이 되면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자기들끼리 차기 대법관과 헌법 재판관 후보자를 놓고 하마평을 하는 걸 보면 사법부의 권력지도가 뒤집어진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풍향계가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 것처럼…. 법원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그만큼 불편해지고, 정치적 사건에 대한 판결과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도 늘었다.

이번 영장전담 판사 평판사들 추천으로 임명돼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는 계속돼야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특검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결정이 대표적이다. 허익범 특검이 수사 연장을 포기한 배경에는 “현재의 법원 상황을 보면 영장 재청구가 실익이 없다”는 현실 진단도 한 요인이었다. 때문에 보수와 진보는 작금의 사법부에 대해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반(反) 문재인 세력에게 사법부는 분노의 표적이 된 셈이다.

김 지사 영장 기각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

우선 법원이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세 가지 요인부터 살펴보자. ①범죄 혐의 ②구속의 필요성 ③상당성이다. 법원은 구속영장 발부를 위해 수사기관이 수사를 통해 밝혀낸 범죄혐의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요구한다. “범죄의 많은 부분에 대한 소명이 있고…”라는 표현이다. 범죄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구속의 필요성 여부를 살핀다. 피의자가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도주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을 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는 구속의 사유가 된다. 범죄혐의가 입증되더라도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으면 불구속 수사를 요구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상당성은 일반인의 법관념상 통상 이 정도면 구속을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기에 공범과의 형평성, 사안의 중대성이 추가되기도 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법원은 김 지사에 대한 영장기각 사유로 ‘수사 미진’을 내세웠다. 영장을 발부할 만큼 범죄혐의에 대한 객관적 입증이 안 됐다는 의미다. 재판부가 “공모관계의 성립 여부 및 범행가담 정도에 관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힌 이유다. “증거인멸의 가능성에 대해 소명이 부족하고, 피의자의 주거 및 직업 등을 종합하면 구속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2016년 9월부터 지난해 대선까지 3000여명의 아이디로 하루 평균 150건씩 모두 8만여건의 댓글을 조작한 피의자의 공범이고, 컴퓨터와 공범들과 나눈 텔레그램 문자를 모든 삭제한 사람에게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전직 대통령과 현직 도지사의 차이인가. 힘없는 공범들에게만 구속영장을 발부한 건 형평성에도 어긋나지 않을까. 모든 피의자들은 법정에서 혐의를 놓고 다투지 않았던가.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해 도입된 영장실질심사 제도가 21년째를 맞았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는데 제도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반 개선된 게 없다.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올 2월 평판사들로 구성된 법관사무분담위원회를 통해 세 명의 부장판사를 영장전담 재판부로 선임한 게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포퓰리즘 성격이 강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진보 성향 판사들의 입김이 작용하는 위원회를 통해 추천된 법관들에게 정치색이 배제된 판단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결과에 따른 비판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자리라고 하지만 판사 한명의 ‘양심적 판단’에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매달려야 하는 것은 이 정부가 얘기하는 투명한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깜깜이 결정에 대한 개선 없이는 앞으로도 법원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법원 일각에서는 세 명의 판사들로 구성된 합의부 형태로 주요 사건에 대한 영장심사를 담당케 하고, 영장 기각 사유를 좀 더 상세하게 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지만 고무줄 결정 논란을 없애는 근본적인 개선책이 될지는 의심스럽다. 뚜렷한 기준도 없이 전직 법관과 외교부 등에 대한 압수영장을 차별적으로 발부하는 법원에 법 적용의 형평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사법부 개혁에 대한 의제가 끊임없이 이뤄지지 않으면 민주와 개혁을 빙자한 정권의 위선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는 김명수 체제라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 시민들이 사법부와 정권과의 거래 의혹을 양승태 체제에 한정해서 바라볼 것 같은가. 김 지사에 대한 재판이 정권의 부침과 함께 할지, 또 다른 돌발 변수에 법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건을 돌고 돌더라. 법원이 정권에 맞춰 코드 인사와 코드 재판을 하는 것도 진보정권이라고 다르지 않더라. “사법부가 무너진 건 법복을 입은 채 정치판으로 뛰어든 판사들 때문”이라는 발표가 부끄럽지 않은가.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