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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박항서 매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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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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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의 별명은 ‘악바리’였다. 지고는 못 배겼다. 키 1m65㎝ 체격으로 거친 축구 몸싸움을 이겨냈다. 한양대 축구부 때는 타 대학 농구부와 씨름 시합을 해서 자신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상대방을 악전고투 끝에 메다꽂기도 했다.

지도자로서는 질곡을 겪었다. 국가대표 수석코치로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과 함께 4강 신화를 썼다. 직후 열린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두 달 만에 경질됐다. 동메달에 그친 게 표면적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스포츠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애초 내정됐을 때부터 박 감독을 헐뜯는 얘기가 난무했다. A대학, B대학 출신이 아닌 ‘비주류’였기 때문이었다.” 외톨이가 된 그에게 손을 내민 건 3년 후배인 최순호 당시 포항 스틸러스 감독이었다. 감독 밑의 코치직을 제안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축구계에서 그는 한동안 후배의 아랫사람이 돼 묵묵히 일했다.

박 감독은 귀 기울이고 다독일 줄 알았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형님 리더십’이다. 그렇게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2년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황선홍 선수가 첫 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이 아니라 박 수석코치를 얼싸안은 게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경남 FC 등 나중에 그가 감독을 맡았던 팀의 선수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박 감독과 같이했을 때가 가장 즐겁게 축구를 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 된 뒤 낮잠을 즐기는 현지 문화를 받아들여 선수들 훈련에 그대로 적용했다. 올해 초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대회에서 베트남이 준우승하는 기적을 일군 건 형님 리더십에 이런 유연함 등이 더해진 때문이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현지 식품업체 득비엣은 ‘서울 핫도그’란 제품을 내놓고 박 감독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 베트남에 한국을 한층 깊이 심는 역할까지 톡톡히 한 것이다.

박항서 감독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마법을 부리고 있다. 일본마저 꺾고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상대는 우리가 6-0으로 이긴 바레인이다. ‘박항서 매직’이 16강을 넘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니 문득 박 감독 같은 리더가 그리워진다. 모두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마이 웨이’를 고집하기보다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 해법을 찾는 리더 말이다. 리더가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국민이 학수고대하는 ‘일자리 매직’도 가능하지 않을까.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