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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50년 동안의 고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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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다음은 동굴도롱뇽이라 불리는 올름(Olm). 1억3500만 년 전, 북아메리카와 유럽이 한 땅덩어리였을 때 도롱뇽의 선조가 살았다. 두 대륙이 분리되면서 북아메리카에는 도롱뇽이 번성했지만 유럽 쪽에서는 한 종만이 동굴 속에서 살아남았다. 가늘고 긴 몸에 동굴 생활에 적응하느라 역시 눈을 버렸다. 한번은 올름 한 마리가 냉장고에서 12년 동안 버려진 적이 있었다. 나중에 열어보니 여전히 살아 있었는데, 소화기관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동굴생물의 세계'를 쓴 최용근에 따르면 눈이 퇴화하고 몸빛이 투명하며 신진대사가 느린 것이 동굴생물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하야가와 이쿠오가 지은 '이상한 생물 이야기'에는 수심 600~1000m 심해에 사는 긴촉수매퉁이가 나온다. 심해에는 빛도 없고 먹을 것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이 물고기는 길게 자란 가슴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를 삼각 받침대처럼 해저에 고정해두고 먹이를 기다린다. 그래서 일명 세다리물고기라고도 불리는 생물이다. 같은 종을 만나기 어려워 자웅동체로 변했고, 온몸에서 돋은 촉수를 펼쳐 작은 갑각류를 찾아다닌다. 심해라는 곳이 차갑고 캄캄하기로는 동굴보다 더한 곳이다.

심해에는 지상의 온천처럼 뜨거운 물이 솟는 곳이 있다. 열수분출구(熱水噴出口)라 불리는 이곳에서 갯지렁이의 일종인 폼페이벌레가 산다. 장영미가 쓴 '심해 생명체의 비밀'에 따르면, 이 생명체는 섭씨 85도에서 활성화되는 효소를 갖춘 박테리아를 갑옷처럼 둘러 뜨거운 열기를 견딘다. 그곳을 벗어나면 갑옷게들이 달려들어 이들을 먹어치운다. 다른 생물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극렬한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생명이다. 가혹한 환경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이 생명들이야말로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 무시무시한 삶의 터전을, 누구도 돌보지 않는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지켜왔다.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현대판 노예' 할아버지의 삶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50년 동안이나 그분을 착취하고 학대한 주인(?)에 대한 분노 이전에, 정신이 모자란 양반이니 저렇게 살다 가는 것도 한 세상이라고 방관한 이웃에 대한 슬픔 이전에, 생계주거비를 매달 지급한 마당에 통장 내역까지 관리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하는 담당 공무원에 대한 한탄 이전에, 할아버지의 삶 자체가 너무 고결했다. 그분은 50년에 걸친 보수 없는 노동, 한없는 매질, 계속된 굶주림, 남루한 의복, 누추한 잠자리를 견뎌왔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무시무시한 고독을 50년 동안이나 견뎌왔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항변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호소한 적 없이, 그렇게 살아오셨다. 생명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인지를 그분의 순한 눈빛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그분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났고, 여생을 편히 보낼 좋은 곳으로 가셨다. 그분은 그걸 누릴 만한 분이다. 이 가혹한 시대를 아름답게 살아낸 진정한 성자이니 말이다.

권혁웅 시인·한양여대 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