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법개정 졸속 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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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은 법개정을 통한 중앙은행 제도의 올바른 개혁은·정부·한은 등 당사자의 이해관계나 정당의 당리당략을 초월할 때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구체적 개정안을 보면 특히 당사자들은 지나치게 자기주장만 내세워 법개정이 순탄치가 않을 것 같다.
한은이 공식적인 개정안을 발표했고 야3당이 아직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잠정 합의안을 선보인 데 이어 정부·여당도 확정안을 내놓았다.
세 가지 개정안을 비교해 보면 정부안과 한은안은 그 차이가 너무 엄청나 타협과 절충이 어렵고 야당안은 절충안과 유사하지만 문제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년초 한은 법 개정문제가 제기된 이후 그 동안 각계 전문가의 활발한 논의가 있었던 만큼 이 세 가지 안은 그 같은 논의내용을 나름대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개정 한은 법은 이들 개정안중에서 취사선택하는 타협적 산물이 될 공산이 크다.
정부안을 보면 과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금통위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임케 하고 은행감독원은 한은에서 분리시켜 금융감독원으로 개편한 다음 재무부산하에 두고, 금융기관설립인가 권도 금통위에서 재무부로 넘기는 것 등이 정부안의 주요골자다.
이대로 실현되면 재무부의 금융지배 권능은 더욱 신장될 것이다.
한은 법개정에서 가장 유의할 것은 법개정의 목적과 취지를 잊지 않는 일이다.
한은 법을 개정하려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는 것처럼 지난날과 같은 타율 금융의 적폐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한은 독립성을 강화하여 한은으로 하여금 통화가치의 안정과 신용질서의 확립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고 통화금융정책의 효율을 제고하는데 참뜻이 있다. 정부안은 이 같은 취지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 것인가.
탐문한 바에 의하면 어느 안이나 장차 타협을 위해 강력한 것으로 제시하고 절충과 타협과정에서 일부 주장은 양보할 것까지 감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사 그런 정황을 감안해도 정부안은 강력한 반대 논리에 그 입론이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제고를 위해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금통위의 격상과 기능강화에는 별로 이의가 없다. 그러나 최대 관심사항인 금통위 의장의 한은 총재 겸임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정부안은 금통위를 한은의 상부기구로 격상시킴으로써 금통위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직해야 한다는 논리이며 금통위 의장의 한은 총재 겸직은 금통위의 기능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이 더욱 보장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 같은 논리와 명분론에도 일응 일리는 있다.
그러나 재무부장관의 제청으로 임명된 금통위 의장이 한은까지를 장악함으로써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과 중앙은행의 자율운영이 저해 당할 소지가 있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본다. 이 같은 점은 한은 법을 왜 개정하는가 하는 본질문제에 해당한다. 한은도 이런 점을 우려하여 금통위 의장의 한은 총재 겸직은 중앙은행 독립성 보장 면에서 후퇴라고 주장, 한은 총재의 금통위 의장 겸임을 주장한다. 한은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은행감독원을 재무부산하로 만들려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재무부 편입은 법개정 취지에도 어긋나고 한은 내 기관사이의 유기적 기능과 금융자율화를 고려할 때 당연하다. 정부의 감독권행사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면 재무부장관이 감독에 필요한 사항을 금통위에 요청할 수 있게 하는 야당안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은 역시 정부로부터 완전 독립을 목표로 타협의 여지를 전혀 안주면서 지나치게 경직된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은과 정부간 정책조화를 고려할 때 정부로부터의 한은의 절대 독립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은은 이성적이어야 하고, 재무부는 기득권 고수자세를 버려야 한다.
절충개정이 불가능할 때는 더욱 신중한 개정을 하기 위해 이번에 정치적 판단에 맡겨 졸속 처리하지 않고 시간을 벌어 더욱 논의하고 절충하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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