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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색 초라한 아빠 숨었지만···사춘기 딸은 달려와 안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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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36)

강원도 태백에 살 때 집 앞이 기차역이라 쉬는 날이면 동해로 소풍 갔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무릉계곡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사진 송미옥]

강원도 태백에 살 때 집 앞이 기차역이라 쉬는 날이면 동해로 소풍 갔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무릉계곡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사진 송미옥]

뚝섬역 근처에 살 때 이야기이다. 아침 뉴스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화창한 아침이라 아이들에게 우산을 챙겨가라고 하니 딸아이는 휭하니 그냥 나가 버렸다. 아들놈은 아직 초등학생이라 시키는 대로 따라주었지만, 늘 살갑고 애교가 많아 우리의 기쁨인 딸아이는 중학생이 되어서부터 사춘기라 삐딱하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학교는 집에서 가까워 딸은 동쪽으로 10분, 아들은 서쪽으로 10분만 걸어가면 되는 위치라 맹모삼천지교를 행한 엄마라 자찬했다. 아무리 부모의 일터가 가깝다지만 아이들 입장에선 집에 오면 빈집이고 밥도 챙겨 먹고 가방도 혼자 싸며 큰애는 동생까지 챙겨야 하는 자신의 삶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입장은 또 달랐다. 이제 빚도 다 갚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황에 접어들었으니 일이 곧 돈이었다. 그땐 아이들도 너무 빨리 커 주었다.

‘너희는 하고 싶은 공부 다 해라. 돈은 우리가 벌어서 대마’라며 우리가 못다 한, 하고 싶은 것을 누리게 해주고 싶은 평범한 부모 마음으로 죽을 둥 살 둥 일만 했다.

결혼 후 더 애틋해진 딸과 아빠. 10년 전쯤 우리 부부가 여행가는 날 딸이 배웅해준다고 나섰던 아파트 앞뜰에서. [사진 송미옥]

결혼 후 더 애틋해진 딸과 아빠. 10년 전쯤 우리 부부가 여행가는 날 딸이 배웅해준다고 나섰던 아파트 앞뜰에서. [사진 송미옥]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건 공부보다는 아침 밥상에서 온 가족이 함께 떠드는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은 안 해도 서로의 마음은 아는지라 어디서든 큰소리치고 힘자랑하던 남편도 사춘기에 접어든 딸 앞에서는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젊든 늙든 여자는 말로는 못 이기는 그 무엇 때문에 집안에서도 만나면 대화를 피해서 서로가 소 닭 보듯 스쳐 지냈다.

배달 갔던 남편이 급하게 들어오더니 우의를 입고 우산을 챙겨 후닥닥 나갔다. 밖으로 나가보니 하늘이 컴컴하게 변해있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들은 우산을 챙겨갔으니 걱정을 덜었는데 오후에 비가 갑자기 오니 예전과 같이 여중학교 수위실에 우산을 맡겨 놓고 돌아올 참이었다. 시커먼 우의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 비 오는 날엔 행색이 처량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어서 가끔 그 모습을 마주 보며 벽에 붙은 현상범 같다며 웃곤 했다. 그러니 만나도 못 본 척해야 할 판인데 하필 그날 수위실에 사람이 없어 기다리는 중에 한 무리가 우르르 나오는 중에 딸아이가 있었단다.

놀란 남편이 수위실 뒤쪽으로 급하게 숨으려는데 멀리서 딸아이의 음성이 들렸다. “아빠~ 아빠~ 우리 아빠야”라며 우르르 달려와서는 아이들이 덩달아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중에 딸이 가슴에 매달려 볼에 쪽쪽 입을 맞추며 호들갑을 떨었단다.

“옷 다 버리는구먼. 다 큰기 와카노” 하며 우산을 들려주고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는데 공장에 돌아와서도 자기를 보고는 못 본 척하거나 숨을 줄 알았던 딸이 끌어안고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그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더 웃기는 것은 저녁에 퇴근해 집에서 만난 두 사람의 표정이었다. 낮의 그 애틋한 만남은 어디로 가고 둘은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소와 닭이 되어 지냈다. 딸아이가 쇼를 했든 연기를 했든 그날은 아빠란 어깨에 커다란 뽕을 넣어 주었다.

고등학생이던 아이들과 아빠. 강촌을 여행한다며 춘천행 새벽 기차를 타고 셋이 다녀왔다. 나는 일터를 지키느라 함께 가지 못했다. [사진 송미옥]

고등학생이던 아이들과 아빠. 강촌을 여행한다며 춘천행 새벽 기차를 타고 셋이 다녀왔다. 나는 일터를 지키느라 함께 가지 못했다. [사진 송미옥]

세월이 지나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영장이 나왔는데 가족이 오랜만에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자기는 아빠 닮은 남자가 되고 싶어서 아빠 나온 해병대를 지원했으니 그리 알라고 했다.

호랑이 같은 아빠가 여우 같은 엄마에게 바가지 긁히는 모습이 애잔했는지 아이들이 커서는 모두 아빠의 편이 되어줬다. 나만 나쁜 엄마가 되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세상에서 겁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자식은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남편은 늘 말했다.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엔 그들 앞에서는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그 좋아하던 술도 자제했다. 죽을 때까지 남편은 자식에게 인정받은 그 두 번의 시간을 최고의 자랑으로 생각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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