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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전봇대’‘손톱 밑 가시’ 못 뽑았는데 ‘붉은 깃발’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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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 “전봇대를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안 됐다.”

전 정부 개혁 현 여권 반대로 실패 #민주당 여당 되며 규제혁신 공감대 #“대통령 나서 지지층 반대 설득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08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 회의에서 전남 영암군 대불국가산업단지의 전봇대를 언급했다. 전봇대가 대형트럭 이동에 방해된다고 기업들이 불만을 쏟아내는데도 탁상행정 때문에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이 전 대통령 발언 3일 뒤 전봇대가 뽑혔다. 전봇대는 순식간에 ‘MB식 규제 완화’의 상징이 됐고, 이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규제 개혁을 국정 과제로 내세우고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나 규제의 철옹성은 견고했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집권 2년 차인 2009년 1만2905개였던 규제 수는 집권 5년 차인 2012년 1만4889개로 오히려 15.3%나 증가했다.

#2. “거창한 정책보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빼는 게 중요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당선인 신분이던 2013년 1월 인수위 첫 회의에서 규제 개혁을 약속했다. 이듬해에는 7시간 동안 규제 개혁 끝장토론도 열었다. 규제를 ‘범죄’ ‘암덩어리’라고도 했다. 인터넷 쇼핑 관련 규제를 언급하며 ‘천송이 코트’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하지만 규제프리존특별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박근혜 정부의 핵심 규제 완화 법안은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의 반대에 막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규제 전봇대’ ‘손톱 밑 가시’에 이어 이번엔 ‘붉은 깃발’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일 “19세기 말 영국에서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자동차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며 불필요한 규제에 대해 전면전을 예고했다. 공약 파기 논란까지 감수하며 은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규제 혁신이 필수라는 게 문 대통령의 생각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달리 규제 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현재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과거 정부에서 규제 완화에 반대했던 민주당이 여당이 되면서 규제 완화에 앞장서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당론으로 규제 완화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이 밝힌 인터넷전문은행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대해서도 정의당을 제외하고는 여야가 대체로 찬성한다. 민주당·한국당·바른미래당은 민생경제법안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규제프리존법·규제샌드박스법 등 규제 관련 법안을 이달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민생경제법안TF 민주당 단장인 최운열 의원은 9일 “여야가 내놓은 규제 완화 법안이 크게 다르지 않아 합의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낙관만 할 수도 없다. 문 대통령 핵심지지 그룹인 진보성향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대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에도 규제 개혁의 일환으로 규제총량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진보단체에서 “삼성 등 대기업에 포획됐다”고 맹비난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이미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반대 입장을 내놨다.

최 의원은 “문 대통령이 앞장서서 시민·사회단체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막연히 규제를 풀어서 경제 활성화를 시킨다고 할 게 아니라 규제 완화를 통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아가 관료 사회가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무원이 자기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규제를 만든 면도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면 움직이지 않는다”며 “감사원의 정책 감사 등 지나치게 공무원의 책임을 추궁하는 관행을 바꿀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윤성민·하준호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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