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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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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남 고흥의 신씨 문중은 알아주는 집안이다. 신중식은 현 국회의원이고, 형 신형식은 옛 공화당 사무총장과 건설부 장관을 지냈다. 그래도 가장 존경받는 아들은 단연 맏형인 고(故) 신정식이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희망을 고향인 소록도에 심은 인물이다. 그는 환자의 손톱.발톱까지 깎아주며 20년간 소록도 병원장을 지냈다. 소록도는 비로소 인간의 섬이 됐다.

"환자들의 천국이 아니라 (…) 오히려 원장님 자신의 천국을 짓고 계신 겁니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의 실화가 배경이다. 무려 100쇄를 넘긴 작품이다. 실화만큼 생생하고 감동적인 것도 없다. 소설 속 주정수 원장은 일본인 병원장 수호 마사토(周防正)가 실제 모델이다. 원생들을 강제노역시켜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참배까지 강요했다. 1942년 원생 이춘상이 그를 살해하고, 이듬해 사형당했다.

소록도 역사에 남은 또 한 명의 일본인 하나이 젠기치(花井善吉). 1920년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8년 동안 원생을 보살핀 병원장이다. 소록도 사람들의 공덕비를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공덕비는 그가 병으로 순직한 이듬해에야 들어섰다. 해방 직후 일제 청산 당시 파괴 직전의 공덕비를 몰래 땅에 묻었다가 원래의 장소에 옮겨 세운 것도 원생들이었다. 소록도는 이처럼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순수한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소록도에는 잊지 못할 흔적이 많다. 43년간 소리 없는 봉사를 마치고 떠난 파란 눈의 마리안 슈퇴거(72).마거릿 피사렛(71) 수녀. 원생들을 가두고 강제로 정관수술을 한 감금실. 한동안 전염 공포로 격리된 아이들과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상봉해야 했던 경계선…. 그나마 6000명이던 소록도 한센병 환자는 이제 600명으로 줄었다.

최근 일제 때 강제격리된 한센인에 대한 보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일본 정부가 입증 서류를 내라고 우기지만, 패망 당시 유실된 자료가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고작 두 명만 보상받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일본만 탓하기는 부끄럽다. 3군 전염병으로 전염력이 매우 약한 한센병. 치료제 '리팜피신'을 한 번만 복용해도 99.99%가 살균되고, 1~2년 복합치료를 받으면 깨끗이 완치된다. 그런데도 지금 2만여 명의 한센인이 전국 88개 정착촌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살고 있다. '한센인 특별법'은 국회에서 잠잔 지 오래다. 뭍과 이어지는 연륙교 완공을 눈앞에 둔 지금 소록도는 묻고 있다.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 있느냐고.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