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선족 처녀의 눈물과 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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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직전 아버지 사진 보는 이매씨. 사진=김성룡 기자

"불쌍한 우리 아버지… 죽어서도 한이 맺히고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하고 계실 거예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조선족 이매(26.여)씨는 10일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비행기 표를 예약해 놓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당신의 아버지가, 이국만리에서 죽음을 선고받고서 가족들의 얼굴만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며 애타게 기다리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이씨는 아버지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입국 절차를 밟다가 지난달 28일 사망 비보를 들었다. 그리고 장례일인 1일에야 전남 목포에 도착해 화장한 뒤 한 줌의 재를 산에 뿌려야 했다.

이씨는 "아버지가 한국에 와 9년 동안 가족과 생이별한 채 번 돈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한국 사람들이 한번만 더 도와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그 돈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남동생, 나를 그리며 한푼두푼 모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것이기에 포기하기에는 너무 안타깝고 아깝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난달 28일 목포시 의료원의 한 병실에서 외롭게 투병하다 숨을 거둔 이용준(53)씨.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농사를 짓던 이씨는 1997년 9월 아내(당시 40세)와 고교 1학년 딸(이매씨),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남겨둔 채 혼자 한국에 왔다.

그는 중국에서 1000만원을 주고 산 여권상의 '김봉오'라는 이름으로, 광주에 정착해 '코리안 드림'을 일궜다. 월세 10만원짜리 단칸방에 살면서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고, 조선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는 무시와 차별, 홀로 사는 외로움을 참아 냈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보람과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게 서툴렀으나 열심히 배우고 성실하게 작업한 결과 실력을 인정받았고, 3 ̄4년 후부터는 작은 일거리를 하청받아 인부를 사서 공사해 줄 정도가 됐다.

아들.딸이 학교를 마쳐 학비 부담이 없어지고 목돈도 손에 쥐어 중국으로 되돌아가려던 무렵인 2003년,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광주의 한 도로 공사장에서 하청을 받아 5개월 동안 포크레인 등을 동원해 일을 해 줬다. 그러나 원청 건설업체는 공사비 2000만원을 주지 않았고, 민사소송 끝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채무자가 상환을 차일피일 미루다 종적을 감춘 것이다.

광주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귀국을 여러 차례 연기하며 돈을 받아내기 위해 뛰어다니던 그는 1월말 배가 아파 병원에 갔다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담낭(쓸개)암이 간과 복막에까지 전이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도 곧바로 중국의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가족 얼굴조차 못보며 피같은 땀을 흘려 번 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0만원이면 중국에서 반듯한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는 돈이다.

병세는 빠르게 악화했고, 4월 들어서는 귀국하고 싶어도 몸이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눈을 감기 전에 안사람과 아들.딸의 얼굴을 한 번 보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는 한국에 온 이후 왕복 40만원이 넘는 항공료 부담 때문에 한번도 중국에 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 사이 각각 17세, 15세이던 딸과 아들이 26세 처녀와 23세 청년이 됐고, 장성한 모습은 사진으로만 겨우 봤을 뿐이었다.

이씨와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했던 동료들과,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들은 광주장애사랑봉사회(회장 서원효) 등이 수술과 중국 가족 초청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지난달 28일 새벽, 가족 재회의 뜻조차 이루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흘 뒤인 지난 1일에야 목포에 도착해 장례식을 치른 딸 이씨는 "그간 많은 분들이 도와준 데 대해 머리 숙여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간 광주 한일병원과 목포시 의료원은 이씨를 무료로 돌봤고, 광주 하남산업단지의 한국스티로폼에서 200만원을 내놓는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금을 전달했다.

숨진 이씨가 2003년 채권 소송을 할 때부터 줄곧 도운 이종형씨는 "이씨 유족에게 채권 2000만원은 피와 같은 돈"이라며 "사법당국이라도 나서서 이를 받아낼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씨가 생전에 '채무자가 자기 집을 비롯한 재산이 있음에도 연락을 끊고 피해 다닌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이해석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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