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 한국인의 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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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1938년 영국의 아서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회담 때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거짓말과 거짓 표정에 속아 히틀러의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결국 '히틀러의 급부상을 도운 정치인'이란 오명을 썼다. 협상이나 회담에서 상대편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이처럼 역사의 흐름도 바뀐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표정을 읽지 못해 오해가 난무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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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표정에 얽힌 비밀을 과학적으로 풀어내는 일은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돼 왔다. 인간의 표정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연세대 심리학과 정찬섭 교수는 "원래 인간의 눈은 보는 데, 입은 먹는 데, 코는 냄새를 맡는 데만 쓰이는 기본적인 생리 기능만 담당했다. 그러나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이들이 생존 기능뿐 아니라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 기능까지 맡게 됐다"고 설명한다.

표정은 바로 눈썹.눈.코.입 같은 이런 얼굴의 특징적인 부분들이 움직이면서 외부로 표현된다. 표정의 변화는 얼굴 근육 2백여개 중 수십여개가 움직여 드러난다.

침팬지 같은 영장류도 표정이 있다. 개나 고양이도 기초적인 표정을 짓는다. 다만 깊은 슬픔 같은 고차원적인 감정 표현은 인간만이 가능한 터라 동물에게서 인간만큼 다양하고 섬세한 표정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유명한 진화학자 찰스 다윈은 인간의 표정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이라는 학설을 제기했다. 그의 의견대로 지금까지 다소의 논쟁은 있지만 슬픔.기쁨.분노.경악 등 기초적인 표정은 각기 다른 문화권에 상관 없이 대동소이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의대(샌프란시스코) 심리학과 폴 에크먼 교수는 뉴기니아 원주민 등 20여개 문명의 표정을 연구했다. 그 결과 미개 문명과 선진 문명에 상관 없이 기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얼굴 표정에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표현 정도에는 문화권 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 문화권의 사람들은 표정을 표현하는 정도가 서양권에 비해 크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연구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구체적인 작동 원리는 뭘까.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 한재현 박사는 "뇌에서 내려진 신호가 얼굴 근육을 움직여 표정이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한다.

뇌 중에서는 FFA 영역이라고 불리는 오른쪽 뇌 부분이 사람 얼굴을 인식할 때 작동하는 부분이다.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는 '얼굴 부지증'이란 병에 걸린 사람의 뇌를 촬영해보면 이 부분이 망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의 두뇌 중 얼굴 인식 영역이 표정과 관련이 많지만, 얼굴인식 외에 감정과도 얽혀 있어 표정과 관련된 영역을 단정짓긴 힘들다.

표정이 먼저냐, 감정이 먼저냐도 심리학의 주요 논쟁거리다. 일반적으로는 감정이 먼저고, 이것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표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연필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지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웃는 표정을 지은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 연구팀은 2000년 한국인의 83가지 표정을 연극배우들과 영화 속 영화배우들을 활용해 데이터베이스화했다. x축에 '불쾌함'과 '쾌함', y축에 '수면'과 '각성'을 놓고 그 정도를 수치화해 좌표값에 따라 표정을 나눈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한 표정'은 감정이 매우 불쾌한 상태에 각성 정도도 매우 높은 표정이다. 또 '우울한 표정'은 불쾌한 정도는 매우 높지만 각성 정도는 매우 낮은 상태다.

연세대팀은 이 한국인의 표정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불쾌함▶쾌함과 수면▶각성의 수치를 입력하면 사람처럼 표정이 변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도 최근 만들어냈다. 2백여개의 얼굴 근육 중 눈 주변, 입 주변 등 21개 근육의 움직임을 데이터베이스에서 뽑아내 평균화했다.

표정 연구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에 활용 가능하고, 비즈니스나 협상 때 상대방 내면의 미묘한 변화를 잡아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표정 산업'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거짓 표정과 진짜 표정의 차이를 알아내려는 연구도 활발하다. 에크먼 교수에 의하면 진짜 웃음은 눈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진짜 미소에서는 윗눈두덩이와 눈썹 사이의 근육, 양쪽 눈썹이 살짝 내려오지만 가짜 웃음에서는 그렇지 않다.

뇌파를 측정해봤더니 자발적이고 순수한 웃음 땐 좌뇌의 전두엽이 자극되지만, 거짓 웃음 땐 우뇌의 전두엽이 자극됐다. 미 FBI는 0.2초 정도의 짧은 순간에 나타나는 표정 변화로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에크먼 교수의 주장을 바탕으로 공항에서 테러분자를 걸러내는 연구도 하고 있다.

표정 연구는 로봇공학과도 결합해 인간을 꼭 닮은 로봇을 만드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 인공 두개골에 인공 근육을 결합해 사람처럼 자유자재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맨'같이 표정이 다채로운 로봇이 우리의 일상에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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