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비밀외교」가 더 효과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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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서 냉전기에 미소가 한때 유엔을 무대로 경쟁적으로 멋진 연설과 토론을 통해 국제분쟁의 해결책을 찾으려던 것을 「회의식 외교」의 전형적 예라고 한다. 전후 유엔외교가 분쟁해결에 무능했을 뿐 아니라 총회를 「말의 잔치」 혹은 선전장으로 만든 결과 때문에 유엔과 회의식 외교는 불신을 받고있다.
또 사전 실무 교섭에서 회담 후 발표할 공동성명까지 합의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상회담은 각기 다른 국민의 지나친 기대와 매스컴이 일으키는 소란 때문에 협상방법으로서는 좋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노태우 대통령의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제의와 이번 유엔 연설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협상방법으로서 갖는 약점과 부정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회의식 공개외교의 무용성과 실패를 비판하는 외교전문가들은 「키신저」가 「닉슨」미 대통령의 밀사로 미·중국관계 정상화과정에서 한 역할과 그 비밀외교방식을 능률적인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88올림픽 개최전, 특히 7·7선언 전에 남북한간의 밀사파견설에 많은 흥미를 가졌던 것도 아마 「키신저」식 막후 비밀외교에 깜짝 놀랄 돌파구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북을 향한 7·7선언, 10·7조치, 그리고 이번 노대통령의 유엔제안은 한국의 일방적인 것이 되어 크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의 북방외교는 상기한 아쉬움에 상관없이 크게 전진하고 있다. 88올림픽의 성공, 그리고 중국과 소련, 헝가리·유고를 비롯한 동구 공산권국가들과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립하게 된 것은 한국외교의 압승이다. 북한의 분명한 패배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외교가 좀 흥분하여 올림픽기세를 몰아 북한을 이번 기회에 외교적으로 완전히 제압하자는 서두름도 보이고 있다.
이런 서두름과 과욕을 염려해 필자는 외교의 묘미 혹은 생리를 원론적 입장에서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원래 외교는 군사행위와 달리 일방적 혹은 지나친 승리를 금기시 한다. 왜냐하면 한쪽의 지나친 승리는 다른 쪽의 적대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만회할 「보복의 기회」를 노리게 만들어 양자간의 관계를 악화시켜 승자 편에 결과적으로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적 압승은 상대로 하여금 군사적 방법에 의한 저항도 불사케 하는 외교적 실패를 초래하기 쉽다는 것이다.
한국의 북방외교를 새롭게 생각해야 할 현시점에서 우리는 남북관계를 우열을 가리는 군사적 사고보다는 승패를 분명히 가리기 않는 외교적 사고로 봐야되겠다. 이런 외교적 사고가 동서 혹은 남북간의 평화공존의 기본요건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공산권 국가들과 무역대표부를 설립하게 된 것은 북방외교의 대단한 성과다. 일단 이 정도의 성공에 만족하고 숨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4강의 남북한 교차승인,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등을 북한의 반대와 싸워 가면서 무리하게 추구해야 하느냐는 한번 냉정하게 따져 보는 것이 좋겠다. 소련·중국 등 공산국가와 한국은 사실상 서로 인정하는 관계에 들어갔고, 정식 외교관계도 시간문제로 되어있다.
이런 상태에서 「2개의 한국」영구화를 음모한다는 치명적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형식문제에 매달러 불필요한 쟁점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우리의 기본입장을 내부적으로 정리하고, 준비할 필요가 없겠는가. 이번 유엔총회연설에서 노대통령이 평양의 정상회담에서 군축문제를 의제로 포함하자고 한 것은 분명 일보전진이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유로 한국을 군사문제회담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는 논리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매년 실시되는 팀스피리트 작전을 북한에 대한 중대한 군사위협이라는 이유로 남북한간의 모든 회담을 중단했다. 주한미군 문제와 핵 병기철거문제에 우리의 장래 계획도 구체적인 것이 없어 설득력을 잃을 때가 있다.
이런 군사문제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 입장을 좀 더 과감히 밝혀 제안하는 것이 아직도 냉담한 북한을 협상으로 끌어내는데 중요한 조치일 것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루 속히 과거의 유산인 5공 비리 등을 과감히 척결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정치·사회질서를 수립하여 우리가 내부적으로 단결하는 일이다. 아마 이것이 북한의 반응을 받아낼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 같다.
또 민주화만 어느 정도 되면 유능한 야당대표들이 여당을 도와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중계자」 혹은 사절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과 체제상의 차이로 대결하는 관계에서는 야당의 역할이 초당적 외교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야당 지도자가 남북관계에서 정부당국의 조용한 「사절」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풍토가 매우 아쉽다. 여하튼 남북간에는 조용한 「비밀외교 루트」와 당분간 「키신저」식 비밀외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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