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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제철 맞은 '과일의 다이아아몬드', 워싱턴 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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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습니다.”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본 홈쇼핑 방송. 쇼호스트가 주문을 재촉하는 것은 새빨간 체리다. 홈쇼핑에서 과일 파는 게 뭐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체리란 과일이 대중 속에 들어온 건 사실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여름에 먹는 체리는 미국 북서부 지역에서 나는 '워싱턴 체리'가 대부분이다. 사진처럼 붉고 과실이 단단하며 단맛이 진한 '빙(bing) 체리' 품종이 대표적이다. 윤경희 기자

우리가 여름에 먹는 체리는 미국 북서부 지역에서 나는 '워싱턴 체리'가 대부분이다. 사진처럼 붉고 과실이 단단하며 단맛이 진한 '빙(bing) 체리' 품종이 대표적이다. 윤경희 기자

2000년대 초반, 그러니까 지금의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젊은 시절을 보낼 때만 해도 체리는 수입 과일 전문점이나 고급 식재료를 파는 백화점 지하 마트에서 판매하던 귀한 과일이었다. 일반 가정에서 싱싱한 생 체리는 언감생심. 케이크 위에 올라 있는 통조림 체리 하나도 서로 먹으려고 쟁탈전을 벌일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국내에선 체리 생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수입량도 적었다.
체리가 대중적인 과일이 된 건 최근 몇 년 새 일이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 3800톤이었던 체리 수입량은 지난해 1만7648톤으로 4.6배 급증했다. 덕분에 요즘 일반 마트뿐 아니라 길거리 트럭에서도 체리를 쉽게 살 수 있다.
요즘 우리가 접하는 체리는 대부분 ‘워싱턴 체리’다. 홈쇼핑 쇼호스트가 말한 "지금이 아니면 못 먹는다"는 것도 워싱턴 체리의 얘기다. 생소한 이름인데 유독 산지 이름을 강조하니 궁금증이 앞선다. 대체 뭐가 다른 걸까. 워싱턴 체리가 생산되는 미국 북서부 일대를 직접 찾아가 봤다.

세계 최대산지 미 워싱턴주 탐방 #만년설과 뜨거운 태양의 합작품

만년설 녹은 깨끗한 물 먹고 자라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도시 야키마의 한 체리 농장에서 수확한 위싱턴 체리.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도시 야키마의 한 체리 농장에서 수확한 위싱턴 체리.

워싱턴 체리는 워싱턴주를 중심으로 한 미국 북서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체리를 말한다. 정확히는 워싱턴·오리건·아이다호·유타·몬태나 등 5개 주에서 생산되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양을 생산하는 대표 산지가 워싱턴주라 그 이름을 땄다. 미국 북서부에선 매년 세계 체리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약 240만 톤이 생산된다. 지난해 한국에 수입된 체리 1만7600만톤 중 63%가 넘는 비중을 차지한 것도 이 워싱턴 체리다.
최근 국내 시장에서 유독 워싱턴 체리를 내세우는 이유는 과즙이 풍부하고 달콤한 맛이 좋아서다. 크기도 커서 큰 것은 500원짜리 동전만 하다. 1년 중 6월 중순~8월 중순 두 달 동안만 수확해 한국에 들어오는데, 상처가 잘 나고 쉽게 물러 유통기간이 짧은 체리 특성상 이 시기 이후엔 먹을 수 없다. 쇼호스트가 ‘지금’을 강조했던 이유다.
지난 6월 미국 북서부 도시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차로 2시간 정도 달리자 체리뿐 아니라 포도·살구·사과 등 과실수들이 끝없이 펼쳐진 도시 야키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키마는 워싱턴 체리 생산량의 90%를 생산하는 체리 산지로 1년 생산량만 230만 톤에 달한다.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있는 만년설. 체리 재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차고 깨끗한 물이 바로 이 레이니어 산에서 공급된다.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있는 만년설. 체리 재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차고 깨끗한 물이 바로 이 레이니어 산에서 공급된다.

체리 농장을 방문하기에 앞서 야키마 중심에 있는 '레이니어 국립공원'을 먼저 찾았다. "워싱턴 체리를 알기 위해선 레이니어 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키스 휴 미국북서부체리협회 국제이사의 안내 때문이다. 레이니어 산은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로 뒤덮인 관광 명소다.

레이니어 산의 모습.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

레이니어 산의 모습.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

체리 재배에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 중 하나가 물이다. 체리가 잘 자라려면 땅이 늘 촉촉한 상태로 젖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강수량이 많으면 당도가 떨어진다. 여름비가 적은 야키마에서 물을 넉넉히 공급해주는 게 바로 레이니어 산이다. 만년설이 녹아내리며 1년 내내 깨끗하고 차가운 물이 농장으로 공급된다. 휴 이사는 "여기에 야키마 지역의 강한 햇빛과 긴 일조량, 일교차가 큰 날씨가 더해져 체리 당도가 높아진다"며 "특유의 단맛 때문에 이 지역 체리를 미국 내에서도 '과일의 다이아몬드'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눈 덮인 산 중턱까지 올라가 직접 눈 위를 걸어봤다. 더운 날씨에도 만년설이 만들어낸 공기가 시원하고 상쾌했다. 눈이 녹아 흐르는 물줄기가 멀리 보이는 체리 농장을 향하고 있었다.

 도멕스 슈퍼 프레시 그로어스가 운영하고 있는 야키마의 한 체리 농장.

도멕스 슈퍼 프레시 그로어스가 운영하고 있는 야키마의 한 체리 농장.

줄지어 빼곡이 자리잡은 나무가 모두 체리 나무다. 이 초록 바다 속에 새빨간 체리들이 보석처럼 영글어 있다.

줄지어 빼곡이 자리잡은 나무가 모두 체리 나무다. 이 초록 바다 속에 새빨간 체리들이 보석처럼 영글어 있다.

산에서 내려와 야키마에서 규모가 가장 큰 체리 생산업체 '도멕스 슈퍼 프레시 그로어스'가 운영하는 농장에 도착했다. 체리 나무가 빼곡이 심어진 너른 들판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선 20여 종의 체리 품종을 재배하는데 과실이 크고 단단한 적갈색의 '빙(bing) 체리'가 대표적이다.

주렁주렁 달려있는 빙 체리의 모습. 수확할 때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도록 손으로 일일이 조심스럽게 딴다.

주렁주렁 달려있는 빙 체리의 모습. 수확할 때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도록 손으로 일일이 조심스럽게 딴다.

오전 7시였지만 이미 햇볕이 뜨거웠다. 농장 직원 20여 명이 체리 수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곳은 오전 4~5시면 이미 일출이 시작돼 오전 11시만 넘어도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햇볕이 강해진다. 체리 농장의 일과 역시 이에 맞춰 새벽에 시작해 점심이 되기 전 그날 일이 다 끝난다. 낮부터 해가 지는 오후 9시까지는 강렬한 햇빛이 체리를 달콤하게 익히는 시간이다. 체리 나무 사이를 잠시 걸었을 뿐인데 등에 땀이 줄줄 흐르고 뒷목이 따끔거렸다. 체리 당도를 높인다는 햇빛의 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체리는 일일이 손으로 딴다. 조금의 충격에도 표면이 쉽게 무르고, 작은 흠집이라도 나면 금방 썩어버리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손길이 필수다. 수확하기 3~4일 전부터는 체리 나무 밑에 은박지를 깔아 빛을 잘 받지 못한 아래쪽 체리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수확을 앞둔 체리 나무 밑엔 은박지를 길게 깔아 놓는다. 아래쪽에 있어 햇빛을 잘 받지 못한 체리까지 잘 익게 하려는 재배 기술이다.

수확을 앞둔 체리 나무 밑엔 은박지를 길게 깔아 놓는다. 아래쪽에 있어 햇빛을 잘 받지 못한 체리까지 잘 익게 하려는 재배 기술이다.

이렇게 아침에 수확한 체리는 바로 냉장트럭에 실려 정오까지 인근 체리 포장 공장으로 보내진다. 여기서 체리는 섭씨 0도로 수온을 맞춘 수로를 따라 움직이며 수 차례에 걸쳐 세척·선별 과정을 반복한다. 과거 사람이 일일이 하던 등급 분류는 이미지 판독 기술을 탑재한 첨단 기계가 자동으로 해결한다. 긴 금속 파이프를 따라 기계에 들어간 체리를 촬영해 입력된 데이터 기준에 맞춰 크기와 상태를 판별해 등급을 나눈다. 크기가 작거나 흠집이 있는 등 품질 기준에 못 미치는 체리는 따로 모아 통조림용으로 사용한다.

세척, 분류, 포장까지 대부분의 과정을 모두 기계화했다. 체리가 물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세척, 분류, 포장까지 대부분의 과정을 모두 기계화했다. 체리가 물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몇 차례에 걸친 세척 과정. 섭씨 0도의 차가운 물로만 씻어 신선함을 유지한다.

몇 차례에 걸친 세척 과정. 섭씨 0도의 차가운 물로만 씻어 신선함을 유지한다.

오후 1~2시면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체리가 상자에 포장돼 바로 공항으로 옮겨져 항공 배송된다. 한국으로 배송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2시간. 체리를 수확한 다음 날 오전이면 이미 마트에 진열돼 판매가 시작된다. 아침에 나무에서 딴 싱싱한 워싱턴 체리를 다음 날 아침 한국에서 맛볼 수 있다.

미국 야키마=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미국북서부체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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