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0억 내놔라” … 1150억 더 부른 엘리엇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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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01면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의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법률 전쟁’이 현실이 됐다. 지난 12일 엘리엇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해 투자자·국가간 소송(ISD) 중재신청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중앙일보 7월 13일자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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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법무부 관계자는 “엘리엇의 ISD 청구가 공식화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13일 법무부에 중재의향서를 냈던 엘리엇은 중재기간(90일)이 만료된 12일 바로 ISD 중재신청서를 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엘리엇은 한국 정부에 7억7000만 달러(약 8650억원)를 피해보상 금액으로 청구했다. 올 4월 중재의향서에 밝혔던 금액 6억7000만 달러(약 7500억원) 대비 1억 달러 늘어난 수치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피해” #중재기간 90일 끝나자 금액 높여 #재판 장소로 안방인 런던 제안 #소송 겹쳐 국세 1조 날릴 수도

ISD 중재신청서에 따르면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표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등 정부 인사와 삼성 경영진 간 부적절한 정경유착 행위로 삼성물산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엘리엇 입장에선 최소 7억7000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이 검찰에 기소된 사실 역시 엘리엇은 중재신청서에 적시했다. 엘리엇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삼성 고위 임원 등에 대한 유죄 선고 과정에서 전 정부가 외국인 투자자들을 희생시켜 가며 삼성 총수 일가를 지원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양측은 향후 각각 다른 중재인을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소송 절차에 들어간다. 국내 국제분쟁 전문가인 김두식(61·사법연수원 12기) 세종 대표변호사는 “ISD 패소를 피하기 위해선 현재 쟁점으로 등장한 결정에 참여한 검사들, 국민연금 관계자 대부분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야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형표 전 장관, 홍완선 전 본부장뿐만 아니라 이들을 기소한 박영수(66·10기) 특별검사, 특검팀에서 근무한 윤석열(58·23기) 서울중앙지검장 등이 향후 ISD 중재 재판에서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따라 한국 정부와 엘리엇 간 승패가 갈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엘리엇은 ISD 중재 재판을 개최할 장소로 영국을 제안했다. 엘리엇 측 법률 수석대리인을 맡은 영국계 로펌 ‘스리크라운’이 있는 런던 등지에서 협상을 벌이겠다는 전략이다.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에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엘리엇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영국 법정에서 열리는 중재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 한 국제통상 분야 전문 변호사는 “한국 정부 입장에선 3년 전 삼성 합병이 국내 자본시장법에 따른 적법한 결정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승소할 수 있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것”이라며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최대 국익, 최소 피해’라는 관점으로 냉정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달 이란 다야니 가문이 제기한 730억원 규모 ISD 재판에서 패소했다. 엘리엇뿐 아니라 미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털 역시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정부에 1억7500만 달러 규모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ISD 중재의향서를 제출한 상태다. 엘리엇의 피해보상 청구금액(8650억원)에 더해 최소 3년이 걸리는 ISD 재판 기간 등을 감안해 법률 비용까지 계산하면 1조원 가까운 국세가 엘리엇과의 ISD에 투입될 수 있다.

◆투자자·국가간 소송제도(Investor State Dispute·ISD)

외국인 투자자가 상대방 국가의 법령·정책 등으로 인해 자신의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 중재를 요청해 손해를 배상받는 제도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등 전문성·중립성을 가진 국제기구가 중재 절차를 수행한다. 정부 정책, 법원 판결에 대해서까지 외국인 투자자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이 조항이 들어가자 진보 진영에선 주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반면 법·제도·문화 등이 상이한 다른 국가에 투자할 때 국내 기업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라는 반론도 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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