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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촌의 소련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선수촌 내에서 소련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7백80명이라는 초대형 선수단 규모에도 불구하고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상복차림의 임원들은 물론「CCCP」라는 문자가 등 쪽에 크게 쓰인 체육복을 입고 다니는 선수들은 하루 세 번씩 꼭 들리는 식당과 숙소주위를 제외하고는 보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겉으로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폐쇄적인 국민성, 그리고 엄격한 통제권사회체제와 함께 이들의 메달을 향한 강한 집념과 노력 때문으로도 보였다.
소련선수들은 대부분 꽉 찬 연습스케줄에 따라 아침식사를 마치고 곧장 연습장으로 향하며 선수촌 내에 머무르는 시간에는 대부분 숙소 내에서 휴식을 취했다.
특히 경기를 앞둔 선수들의 행동은 엄격히 통제돼 체조선수들의 경우 경기를 며칠 앞두고 부터는 건포도 한 알·사과 한 조각도 정확히 그램 단위로 포장된 식사만으로 체중을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이같이 철저한 통제와 관리에 선수들이 따르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것은 경기가 끝난 뒤 승자와 패자에게 주어지는 현격한 대우의 차이가 큰 요인인 듯 싶었다.
메달리스트의 경우 경기 다음날 아침9시에 선수단 숙소 내에서 자체시상식을 마련해「그라모프」체육부 장관이 직접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 꽃다발과 포상금의 l5%를 달러로 지급하며 귀국일자와 체류장소를 선택하게 해주는 반면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다음날 대부분 귀국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련선수들이 경기 이외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폐쇄성과 경계심은 선수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눈에 띄게 변화를 나타냈다.
입촌 초기 이들은 한국인이 러시아어로 말을 붙이면『정보기관원이 아니냐』며 경계의 눈빛을 보이거나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숙소 내에서도 꼭꼭 문을 잠그고 생활하면서 자원봉사요원이 청소하러 가도 몇 번씩 신분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어주곤 했었다.
특히 일부 선수들은 청소하는 동안 자원봉사자를 계속 감시하는 눈치였으며 식당에 들어갈 때도 운동가방과 기구를 입구에 있는 보관소에 맡기지 않고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곳 물정을 알게되자 특히 후반에 들어서는『감사합니다』『안녕하세요』등의 한국말을 익혀 인사를 하는가하면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며『어디서 배웠느냐』고 묻기도 하는 등 감정을 나타냈다.
특히 어린 체조선수들은 숙소자원봉사요원들과 친해져 지난달 28일 퇴촌 할 땐 모두가 배지와 그림엽서 등을 선물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는데「라흐체노바」양은 한 자원봉사 아주머니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대부분 소련선수·임원들은 실제 와서본 한국의 발전상에 놀라는 눈치였으며 특히 전자제품 등 소비재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몹시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포상금을 받은 선수들은 대부분 비디오나 카셋 등을 구입하는 모습.
이들은 그러나 소련국내 상황을 묻는 질문에는 철저히 노 코멘트로 일관. 운영요원·자원봉사자중 소련인 들을 일상에서 접해본 한국인들은『오랜 폐쇄사회 체제에서 자기를 감추고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데 길들여졌지만 서구인들에 비해 소박한 사람들』이라고 인상을 말하고 있다. 여전히 소련은 자기들이 남을 못 믿는 만큼 의심스런 나라였다.<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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