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작품에 가린 창작 무용|서울국제무용제 참가 국내작품을 보고 이상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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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역사의 발전을 믿는다면 일시적인 침체현상도 발전의 한 과정에 있다고 봐서 침체 또한 발전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서울국제무용제(8월21일∼9월30일)의 창작무용들이 예년 수준만큼도 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가운데 수작도 있고, 졸작도 있게 마련이다.
소련 볼쇼이 발레단의 올스타 쇼(갤러)공연 형식에다 런던 컨템포퍼리 무용단의 작품 『숲』이 보여준 서정성 등 무용제 초반에 이미 세계적 수준의 무용예술에 입맛을 들인 탓에 어쩌면 우리의 창작무용이 더 침체되어 보였을 수도 있었던게 사실이다.
금년이라고 해서 특별히 무용제의 창작무용수준이 떨어질 것도 아니건만 확실히 빛이 바래져 보인 까닭은 대부분의 창작무용이 『한국적인 소재』에 주박당해서 주제를 온통 전통적 내지는 민속적인 것에 귀착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8월21∼22일)으로 시작된 서울국제무용제의 전반부는 외국초청공연위주였던 반면 후반부에 가서는 창작무용 일색이었다.
창작무용의 경우 예년의 무용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합작할 수 있는 두 단체인 경우, 작품 하나로 묶어지는 공연단체 선발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김숙자 무용단과 한국 남성무용단의 『오열도』, 홍정희 발레단과 발레블람의 『장생도』등이 그렇게 선보여졌다. 두 팀끼리의 경쟁의식이나 무용단 경력의 두드러진 차이 때문에 공연제작에 실패한 케이스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결국 우리는 이번 무용제에서 발레 넷(『왕자호동』 『심청』 『장생도』 『시골로 갖더란다』), 한국무용 넷(『오열도』 『학물림 굿』 『고리』 『하얀초상』), 현대무용 셋(『물마루』 『요석, 신라의 외출』 『틈·터·틀』)가운데 대부분이 너무 정공법으로 전통적 소재를 자기장르에 원용시켜 『한국 문화의 국제화』라는 명분이 오히려 짐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특이한 소재라면 『물마루』 『시골로 갖더란다』 『요석, 신라의 외출』정도를 골라낼 수 있다. 『물마루』는 동요같은 요정의 아름답고 절제된 시가 될 수도 있는 현대무용이었다. 그러나 전반부의 차분한 분위기는 후반부 들어 붉은 의상의 안신희의 격정 탓으로 『물마루』의 신선감을 상실케 했다.
발레 『시골로 갖더란다』는 건강한 자연을 배경으로 사랑을 스케치하는 현대발레의 시도이지만 솔로, 2인무 등 비온 뒤끝의 소박한 인간교류를 그리는 일상성의 발레화가 오히려 발레예술의 품격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각박한 산업화 사회지만 그래서 시골로 가서 그런 낭만이나 구가해야 되겠는가.
『요석, 신라의 외출』은 그야말로 특이하게 해석된 원효이야기였다. 요석공주의 개성을 보편적인 여인상으로 심화시킨 이 작품 편두에서 의자와 김화숙의 춤은 『외츨』의 의미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대했다.
원효는 해걸바가지 덕분에 도를 통한 것이 아니라 『요우』이라는 여인을 통해 건강한 본능과 거침없는 자유의 경지에 이른다. 살색 타이츠의 무용수들이 고전과 현대의 고뇌를, 사랑과 해탈의 경지를 그리고 에로스의 미학에 대한 무용예술가들의 번뇌를 직접적으로 특이하게 그렸다는 뜻에서 이 작품은 계속 언급될만하다.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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