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숙소도 몰랐다, 갈수록 열받는 폼페이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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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의 협상”→“북한 반응, 나도 의아했다”→“북한에 최대한의 압박”→“내가 강도면 전 세계가 강도”.

평양 뜰 때만 해도 “북과 선의 협상” #북한이 맹비난 나서자 “나도 의아” #“미국이 강도면 세계가 강도” 받아쳐

지난 6~7일 평양을 방문한 뒤 8일 도쿄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 일정을 소화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발언 수위는 이렇게 높아졌다. 격앙돼 가는 그의 감정 기조는 북한과의 협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앞줄 왼쪽)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뒷줄 오른쪽)이 평양의 백화원초대소에서 회담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앞줄 왼쪽)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뒷줄 오른쪽)이 평양의 백화원초대소에서 회담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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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생산적”=7일 오후 4시26분 평양을 떠날 때만 해도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에 호의를 표시했다.

동행한 기자들에게 “복잡한 이슈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주요 이슈에서 우리는 진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산적인, 선의의 협상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바로 그날 저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을 비난하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내놨다.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부위원장 간 회담에 대해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고 평가절하했다.

#“의아”=도쿄의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8일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 등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전날 북한의 반응을 접했을 때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나도 (북한 반응이) 의아했다. 이해가 안 됐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추상적인 합의들을 구체화하는 자리였다. 서로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각을 서로 나열하는 자리였다. 북한이 미국의 생각에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전문가들의 설명을 종합해 보니 전형적인 북한의 협상전술이 아닌가 싶다. 미국으로선 짚을 건 다 짚었다. 앞으로도 원칙을 갖고 해 나갈 것”이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의 의미를 나중에 파악했다는 뜻이다.

폼페이오와 동행한 블룸버그통신 니컬러스 워드험 기자가 공개한 회담장 사진. [워드험 트위터]

폼페이오와 동행한 블룸버그통신 니컬러스 워드험 기자가 공개한 회담장 사진. [워드험 트위터]

#최대한의 압력=8일 오전 폼페이오 장관은 반격에 나섰다. 이날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된 고노 다로(河野太郎) 일본 외상과의 조찬회담 결과를 자신의 트위터에서 전하며 “북한에 대해 최대한의 압력을 유지하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적었다. 6월 초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트럼프 미 대통령이 “더는 북한에 최대한의 압박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한 뒤 사실상 자취를 감췄던 표현이었다.

하지만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날 조찬회담에서 최대한의 압박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회담에선 나오지 않았던 말을 폼페이오 장관이 대북 압박을 위해 일부러 트위터에 남긴 것이다.

#전 세계가 강도=북한에 대한 폼페이오 장관의 압박은 외교장관 회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고조에 올랐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강도라고 비판했다’는 AFP통신 기자의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 요구가 강도 같다면 전 세계가 강도다. 안보리 제재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고 받아쳤다. 또 전날 기자들에게 폼페이오 자신이 했던 “(협상에서) 진전이 있었다”는 발언이 이날은 “진전만으로 기존 제재 조치의 완화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도쿄의 외교가에선 “북한을 순진하게 대했던 폼페이오 장관이 예상 밖의 비난을 받은 뒤에야 그들의 협상 전술 등을 파악했고, 그래서 더 강경한 대북 발언을 쏟아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평양 회담 취재를 위해 폼페이오 장관과 동행했던 미국 블룸버그통신 니컬러스 워드험 기자는 8일 블룸버그 홈페이지에 올린 취재기에서 “지난 6일 오전 평양 도착 당시 폼페이오 장관 일행은 자세한 방북 일정을 전달받지 못했고, 심지어 숙소조차 파악 못 했다”고 썼다.

워드험은 “30시간도 안 되는 혼란스러운 방문의 시작이었다. 장관과 수행단, 동행한 기자 6명은 예상치 못하게 평양 외곽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어야 했다”며 “세상에서 가장 은둔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정권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줬다”고 밝혔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김지아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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