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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in] 전공·시공의 장벽 허무는 '지식 게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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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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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실험실이다. 전공의 경계,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부가 실험되는 곳. 대학의 지식인들이 정규군이라면, 수유+너머의 연구원들은 '지식 게릴라'다. 이들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실험한다. 전공과 논문식 글쓰기의 무게에 짓눌린 삶을 거부하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들이다. 이진경, 고미숙, 고병권. 지식 게릴라를 이끄는 간판 스타다. 80년대 운동권 이론가로 유명했던 이진경을 비롯해 모두 마르크스주의에 빠졌다가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로 전환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공부는 생활이다=여느 연구소와 다른 수유+너머의 특징은 '동고동락(同苦同樂)'이다. 회원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소에서 함께 먹고, 함께 놀며, 함께 공부한다.

잠만 각자 집에서 따로 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연구 코뮌(Commune.공동체)'이라고 부른다. 공부와 생활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대개 세미나나 강좌에 참여하러 왔다가 함께 먹고 놀고 공부하는 생활에 매료된다.

한끼 식사 비용은 1800원. 먹을 만큼 먹고, 음식을 남겨선 안된다. 자기 그릇은 스스로 설거지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 종묘와 창경원은 이들의 앞마당이다. 식사를 마치고 30-40분가량 앞마당을 산책하며 연구공간의 숙제를 논의하고 풀어간다.

코뮌이라 하면 흔히 무슨 거대한 이념이나 은밀한 혁명조직이 연상되지만 수유+너머는 그렇지 않다. 고미숙은 말한다. "거창한 이념으로 생각할 것 없다.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프로그램의 하나일 뿐이다. 고통받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구제는 그 다음 문제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을, 사회를 위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수유+너머 같은 크고 작은 코뮌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지구촌 곳곳에 생겨나기를 바란다. 육아방이나 공동주택도 구상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결혼을 해서 아기들이 생겨나고, 또 연로한 부모들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유+너머는 8년 전에 비해 양과 질에서 크게 진화했다. 하지만 진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철학과 규율이 있다.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는 것. 인간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마저도 상대적이다. 관계와 관계, 맥락과 맥락이 부딪치고 접속하며 펼쳐지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새로운 인간 관계를 즐긴다. 공부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 모든 것이 공부다. 즐기면서 하는 공부, 이들이 지향하는 연구의 유토피아다.

◆공간은 변신한다=이들이 생활하는 건물은 모두 3층이다. 옥상까지 4개의 공간이 이들의 무대다. 1층은 식당-강당-체육관을 겸한다. 겸한다는 것, 어울리지 않은 것들의 조화를 이곳에선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식탁보를 벗겨내면 어떤 것은 책상이고, 어떤 것은 탁구대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고전문학 따로 하고, 현대 철학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과 역사와 문학은 물론 동서양 고전과 자연과학, 한의학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사유의 날개를 펼친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20세기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가 시공을 뛰어넘어 초대된다. 그런 열린 자세는 수유+너머의 경쟁력이다.

건물의 2층은 카페, 세미나실, 영화관람실, 갤러리, 서점으로 이용된다. 방마다 용도가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칸막이를 치거나 빼면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3층은 공부방과 요가실. 책상의 좌석 독점은 금물. 소지품은 벽쪽에 세워놓은 공용 책꽂이를 사용한다. 장기간 많은 책을 펼쳐놓고 글을 써야하는 회원에겐 집필실이란 이름의 개인 책상을 제공한다. 논문이나 저술을 생산해야만 집필실을 나올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기에 섣불리 개인석을 차지려고 하지 않는다.

◆많이 벌기보다 적게 쓴다=수유+너머의 매월 유지비용은 건물 임대료를 포함해 1000만원 정도. 외부의 후원은 없다. 스스로 생산하는 컨텐트와 자율적 생활이 특정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우려하기에 기업.정치단체 등의 기부금은 받지 않는다. 주수입원은 정회원의 회비, 수강료, 강사들이 자발적으로 내놓는 특별회비. 정회원 60명은 개인 여건에 맞춰 매월 3만~20만원의 회비를 낸다. 식사 준비와 건물 청소도 정회원 몫. 3~4개월 단위로 열리는 강좌나 세미나의 주제는 제한이 없다. 한 강좌당 수강료는 7만원 정도다. 고병권 대표는 "많이 벌기보다는 적게 쓰는 법을 배워나가기 때문에 부족한 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뜻에 공감한 이들이 전해주는 쌀과 반찬거리 같은 소량의 선물은 받고 있다. 최근 6개월간 쌀을 사본 적이 없다. 건물 내 집기와 가구는 거의 다 재활용품. 이사 가는 회원들이 쓰던 물건을 가져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연구실이 자리를 잡아 나가자 진로와 노후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고미숙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공부만큼 확실한 노후대책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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