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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우려되는 비핵화 진공 상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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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미국은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 ‘강성’의 존재를 5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담판을 지으려 했다. 사전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북한과 이 문제를 심도 있게 협의했다. 워싱턴의 핵심 관계자가 털어놓은 이야기다(중앙일보 5월 16일자 1면). 핵무기 원료가 되는 고농축우라늄(HEU)은 ‘악마의 디테일’이다. 생산시설과 보유량 추정이 플루토늄에 비해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이 사활을 걸고 찾고, 북한이 사활을 걸고 숨긴 이유다. 본지 보도 이후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보고서를 통해 “강성이 영변보다 먼저 지어졌다”며 규모도 영변의 두 배 이상이라고 콕 집어 규정했다. 여기까지는 미국의 정보력, 북한의 과거 핵 야욕 등을 감안했을 때 이해가 간다. 의문은 여기부터다. 미국은 북한과의 사전협상을 통해 북한이 ‘강성’의 존재를 싱가포르에서 공표하는 걸 자신했다. 김정은의 ‘통 큰’ 결단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돌연 무산됐다. 어쩌다 북한의 기만술에 말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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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3차 방북(5일)을 앞둔 요 며칠 사이 미 언론들이 ‘강성’ 관련 보도를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백악관, 정보기관에서 작정하고 흘리지 않는 한 나오기 힘든 내용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재압박’일까, 아니면 북·미 간 ‘재합의’가 이뤄졌다는 신호일까. 두고 볼 일이다.

비핵화 지지부진 속 미국 내 관심 저하 #최악 시나리오임에도 우리만 군축 준비

하지만 분명한 건 북한이 이번 폼페이오 방북 시 ‘강성’의 존재를 밝히고 HEU 보유 규모를 제대로 신고하느냐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가늠하는, 달리 말하면 협상이 계속될 수 있을지를 결정할 것이란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 이슈는 미국 내에서 급격하게 다른 변수에 묻힐 가능성이 크다.

당장 트럼프는 9일 앤서니 케네디 연방 대법관의 후임을 지명한다. 미국에선 대법관 지명이 엄청나게 큰 뉴스다. 이어 16일에는 헬싱키에서 미·러 정상회담을 한다.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에 대한 뮬러 특검의 칼날이 트럼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로선 푸틴의 ‘결백 증언’이 어찌 보면 북한 비핵화보다 몇 배는 절박할 수 있는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지부진한 북핵 이슈는 이민법·무역전쟁·중간선거 이슈로도 급격히 대체되고 있다. 유권자, 전문가그룹, 의회 모두 마찬가지다.

즉 미국은 당분간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면 스토브에서 (요리가 안 된) 칠면조를 서둘러 꺼내는 것과 같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버티고, 북한은 미군 유해 송환 같은 ‘비핵화 곁가지’로 생색내고 협상의 동력만 유지하는 ‘우보(소걸음)’ 작전으로 버틸 공산이 점점 커지고 있다. ‘비핵화 진공 상태’다. 우리로선 이도 저도 아닌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미 연합훈련, 국군 단독훈련 중단도 모자라 각종 첨단무기 개발사업, 북한군과 마주하는 최전방 90~100개 군부대 시설 공사 일정까지 속속 보류 중이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최전방 지역의 군사시설에 변동이 생길 수 있는데, 그때 가서 철거하면 ‘비용’이 추가로 들기 때문이란다. 어처구니없는 얘기다. 북한이 비핵화는커녕 핵 은폐, 심지어 확장에 나서고 있다는 정황까지 나오고, 미국은 무기력하게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상황인데 우리만 군축 준비를 한다니.

비핵화 없인 제재 해제도, 북·미 관계 수립도, 남북관계 정상화도, 군축 논의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방북 귀환길 폼페이오 손에 뭐가 들려 있을지도 궁금하지만 현실을 벗어난 우리만의 ‘무한 희망’의 끝은 어딘지 더 궁금하고 걱정되는 요즘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