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화투(花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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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란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최정례(1955~), '화투(花鬪)'

왠 청승에 불건전. 그렇게 보셨어요? 리듬이 있고 그림이 펼쳐지고. 기막힌 감정이입. 꽃들의 투쟁 속에 계절은 가고 비는 내리고. 세상을 끌어안는 신생의 순간인데 어머나! 뽕짝 같은 이 몸은 어쩌지요. 회한과 욕망의 빗방울이 떨어지네요.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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