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盧平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지금 이 시간부터 자유!/지금 이 시간부터 나는 명한다. 모든 속박과 허망한 제한에서 나 자신을 해방할 것을/어떤 곳으로 가든지 나는 나 자신의 주인.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많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만상이 다 내게는 아름답다."(월트 휘트먼)

홀로 선 기독교 사상가, 한국 무교회주의의 2세대 리더 노평구 선생. 그는 서른네살 때인 1946년 11월 신앙잡지 '성서연구' 창간호를 휘트먼의 시를 소개하면서 열었다. 그로부터 '성서연구'는 99년 5백호 종간호까지 53년간 '盧주필'의 분신이었다.

노평구 선생은 15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91년간 추구하던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에게 건국포장이 수여되고 애국지사 호칭이 붙은 것은, 배재중학 3학년 때 가담해 1년 옥고를 치렀던 광주학생운동 때문이었다.

盧선생의 삶은 그러나 애국지사의 그것을 넘어선다. 고전적인 진리탐구자의 삶이었다. 교회의 제도적 억압에 홀로 맞선 종교개혁가 루터가 그의 인생모델이었다. 그는 40대에 자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소학교는 동맹휴업으로 졸업을 못하고, 중학은 광주학생사건으로 끝을 못 맺고, 대학은 입시 낙제했다. …성서 연구는 나 같은 인간의 찌꺼기가 아니면 끌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믿음의 체험, 순종의 생활이다. 나의 죄의 문제의 해결, 예수의 십자가에 의한 양심의 고민에서의 해방이다."(55년 3월, 제50호)

일제.건국.전쟁.재건.정쟁과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盧선생은 철두철미 민족의 도덕적 각성, 인격의 자각, 영혼의 신생(新生)을 부르짖는 예언자이고자 했다.

그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조선조의 사색당파나 해방 후의 좌우익 대결, 지금의 세력 간 충돌은 정치지상주의, 정치과잉의 폐습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盧선생은 그런 것보다 앞으로 3백~5백년을 이어갈 수 있는 종교적.도덕적 각성운동을 강조했다.

"경제적 중산층이 아니라 정신과 도덕의 중산층이 생겨나야 한다. 진정 우리의 사상과 종교가 살아나야 한다."(87년 4월, 제392호)

한국 무교회주의의 종교개혁적 신앙운동은 김교신.노평구 선생에 이어 이제 4백여명에 이르는 성서연구 독자들에게 넘어갔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