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의식한 평화제스처|「남북정상회담」제의 배경과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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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의 김일성이 8일 9·9절 40주년 전야제 행사에서 노태우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한다고 언급한 대목은 진의여부를 뗘나 최근의 남북한 사정 및 국제관계의 기류를 감안할 때 일단 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김일성은 이날 연설에서 『연방제통일을 위한 남북한 실무위원회 설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며 『그러나 이에 앞서 주한미군의 철수와 남북 상호불가침 조약의 체결 등이 선항돼야한다』는 요지의 내용을 밝혔다.
이같은 김의 제의에 대한 우리측 시각은 두가지로 종합되고있다.
하나는 김이 북의 기본적 대남 전략상의 목표인 주한 미군철수 등 전제조건을 달고있다는 점에서 이번 제의는 선전전의 차원뿐이라는 시각이다.
북측은 그동안 「정상회담」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어떤 조건을 내걸고 「정상회담」과 유사한 종류의 회담제의를 해왔었다.
즉 북한측은 남븍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우리측이 남북 고위당국자회담·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면 그 역으로 3군 회담의 실현, 혹은 남북한 정치·군사회담을 남측이 받아들이면「보다 높은급의 회담」을 할 수 있다고 맞받아 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맥락에서 볼때 이번 김의 제의는 8·15 경축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제의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맞불작전」의 일환이지 진실로 이문제에 관심을 갖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보면 두가지 측면에서 관측할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시기면이다. 즉 올림픽 개최를 며칠 앞두고 자신들의 정권 창립기념일인 9·9절 기넘행사에서 그같은 제의를 했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정상회담에 성의가 있다면 이같은 시기는 피해서 할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다.
우리측이 올림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지금 시기를 택했다는것은 올림픽에 쏠리고 있는 전세계의 관심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또 9·9절 행사에 양상곤 중국국가주석등 북한측 동맹국들의 귀빈들이 대거 참석한 상황에서 김의 이번 발언이 나온 점도 마찬가지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내용면이다.
즉 김의 연설 내용에는 기존의 대남전략의 변화를 암시해 줄만한 대목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고려연방제·주한미군 철수등을 선행조건으로 내걸어 이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하게됨에 따라 우리측이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게 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볼때 김의 이번 발언은 올림픽 열기를 의식한 평화 제스처가 아니겠느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다른 일각에서는 김의 제의를 보다 심사숙고해 봐야한다는 견해도 있다.
정부의 남북문제 고위 당국자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우리측의 정상회담제의에 한번도 반응이 없다가 「정상회담」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응답을 한점과 최근 북한의 내부사정을 감안해보면 김의 이번 제의에는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 내포돼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즉 북한은 최근 가중되고 있는 중소의 개방압력, 김정일 체제로의 권력세습에 따른 내부갈등 등으로 이제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시점에 봤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런 맥락에서 김의 발언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또다른 당국자는 『김의 이번 발언은 올림픽후 대남전략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일단 「자신들이 반대해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자는 의도에서 나온것 같다』며 『따라서 이번에는 획기적인 내용이 담겨있지 않으나 앞으로 우리측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제6공화국 출범후 노태우 정부가 「남조선 인민의 36%지지」밖에 얻지 못했다하여 학생회담· 국회회담이나 제의하면서 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던 북한이 일단 「만난다」는 말을 하고 나온것은 새롭다는 분석도 있다.
이를 두고 북한이 노대통령의 중간평가를 겨냥, 남쪽을 부추기는 의도로 보는시각도 있다.
결국 김의 이번 제의에 대해선 앞으로 올림픽 후 북한측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그 의도가 명확해진다고 보겠다.
북한측이 앞으로도 주한 미군철수등을 선행조건으로 고집하는 한 어뗘한 돌파구 마련은 어렵겠으나 우리측이 새로운 조건을 걸고, 역제의를 하고, 이에 따른 북한측 반응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는게 일반적 관측이다.<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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