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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일 총리 관저에 물밑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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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왼쪽)이 지난 21일 방한해 유명환 외교통상부 제1차관과 악수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22일 극적으로 타결된 한.일 동해 대치 드라마의 막후에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은 공식적으론 사태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미 국무부는 "이번 사태는 한.일 간 문제로 두 나라가 해결할 문제"라며 "평화적, 우호적으로 해결되길 바란다"는 무미건조한 논평을 19일 냈다. 미 국무부 관계자도 "한.일 양국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오랜 방침"이라고 말했다.

엄정중립을 지키던 워싱턴이 막후에서 손을 쓴 것은 동해 사태가 위기 상황으로 치닫던 20일. 일본 정부는 이날 해안 보안청 소속 해양 측량선 두 척을 돗토리(鳥取)현 사카이(境)항에서 출항시켜 연안에서 '출동'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내각에 "국제법에 따라 확실하고 냉정하게 대응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서울에서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한국 측의 '강경 입장'을 통고했다. 이때만 해도 한.일 동해 충돌은 예정된 코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이날 오후 3시를 기해 급변했다. 일본 외무성이 도쿄의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외무성 사무차관의 서울 파견을 전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 변화와 관련, 일본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 이는 총리 관저에도 전해졌다"고 말했다. 또 마이니치(每日)신문도 같은 날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22일 최종 협상 때는 총리 관저로부터 "이제 그만 결론을 내라"는 지시가 야치 차관에게 전달됐다고 니혼게이자이(日經)신문이 전했다.

미국이 조기 봉합 쪽으로 방침을 굳힌 것은 '중국 요인'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모두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수로 측량 같은 사소한 문제로 충돌하고 그 위기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이는 미국의 리더십에 균열을 내는 것은 물론 동태평양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국의 위상 강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은 사태 초기 단계부터 각종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에 우리 입장을 설명하고 지지를 구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윤병세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사태 초기인 14일 방한 중이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만나 사건을 설명하고 미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청와대가 일본의 측량선이 독도 인근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탐사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열었던 때다.

윤 차관보는 "외국 외교관과 나눈 얘기를 일일이 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한 소식통은 "힐 차관보는 한국 입장을 주의 깊게 들었을 뿐 특별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힐은 이날 한국 측 입장을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물론 국무부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또 천영우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미국 인사를 만났으며 도쿄(東京)에서는 라종일 주일 대사가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를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원기 기자 <brent1@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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