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이 이끈 한국 정치의 ‘뉴노멀’…‘기울어진 운동장’ 현실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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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 [중앙포토]

한국 정치에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의 시대가 도래한 걸까. 6·13 지방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완승이자 자유한국당의 완패로 끝나면서 정치권은 승인과 패인을 분석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가운데 이제 한국 유권자의 이념 지형 자체가 과거와는 다르게 재편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기존 정치권에선 ‘진보 : 중도 : 보수’ 유권자의 분포를 ‘4 : 2 : 4’의 비율로 봤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모두 중도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책 경쟁을 하다 보면 서로 공약이 비슷해지는데, 이를 중위투표자정리(median voter theorem)라고 표현한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문재인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게 이런 사례에 속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최순실씨와 함께 출석한 모습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최순실씨와 함께 출석한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이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한국 정치의 유권자 분포를 변화시켰다는 게 이들 전문가의 생각이다. 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중도에 있는 20%가 거의 모두 문재인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며 “국정농단 사건을 거치면서 정치권의 게임 자체가 ‘진보 : 보수 = 6 : 4’가 기본이 됐다”고 말했다.

강원택 서울대(정치학) 교수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여파로 인한 보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유권자들을 상대적으로 진보 쪽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흔히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선 진보와 보수가 팽팽히 맞서던 과거에 비해 자유한국당이 훨씬 더 큰 노력을 기울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지방선거 대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바뀐 지형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한국당이 유권자에 호소해 표를 얻을 수 있는 ‘타깃 좌표’를 잘못 찍은 것도 문제였다. 4·27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판문점 선언에 대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위장 평화쇼”라고 비난한 게 대표적이다. 아무리 많이 얻어도 40% 이상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패착이 된 것이다.

상대편이었던 이인영 민주당 의원은 선거 다음날인 1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어떤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극우 보수, 맹목적 보수, 심하게 표현하면 꼴통 보수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며 “그런 시대정신을 반영해서 국회에서도 보수가 평화를 수용하는, 보수 혁신의 길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1987' 포스터.

영화 '1987' 포스터.

인구 분포가 바뀐 것도 뉴노멀에 영향을 끼친 것을 보인다. 과거 50대는 60대 이상과 묶이면서 보수층에 속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의 50대는 이른바 ‘86그룹(60년대 태어난 80년대 학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50대가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을 선택한 건 통계로도 나온다. 지방파 3사의 서울시장 출구조사에서 50대의 54.2%는 민주당 후보로 나선 박원순 시장을 택했다. 출구조사와 실제 득표율에 일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박 시장의 50대 출구조사 득표율은 실제 기록한 전체 득표율 52.8%보다 높다. 50대에 접어들어 보수화되는 경향보다 80년대 군부독재에 투쟁했던 ‘의식화된’ 세대로서의 특징이 더 강하게 나타난 셈이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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