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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재계대표와 간담회…혁신성장 의지 볼 수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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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경제수장과 재계 대표가 규제 개혁에 대해 논의한 시간은 15분이었다. 15일 오전 8시25분부터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사이의 간담회는 시계가 예정 종료 시간인 8시40분을 알리기 무섭게 끝났다. 15분이면 뜨거운 차 한 잔을 호호 불어가며 마셔도 겨우 다 마실만한 시간이다. 이 짧은 시간에 두 사람을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대한상의에 따르면 이날 박 회장은 본문만 12페이지에 걸친 '규제개혁 프로세스 개선 방안' 자료를 준비해 김 부총리에게 브리핑했다. 상의는 이 자료에서 역대 정부가 규제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상세히 분석했다. 공무원의 책임 시비와 감사 부담, 정부의 부처 간 칸막이, 기득권층의 생존권 위협 의식, 소비자의 불안감, 국회의 이익단체 편향, 국민의 반기업정서 등을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각종 장애물에 막혀 규제개혁이 실종되지 않도록 한 번에 입법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규제개혁 프로세스(규제개혁 튜브)를 제시했다. 사회적 대립이 큰 사안은 4차 산업혁명위원회의 해커톤 방식도 차용하는 등 공론화 절차도 거쳐, 합의가 쉬운 주제부터 성과를 만들어 가자는 발상이다. 기존 규제개혁 처리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이런 새로운 아이디어를 15분 만에 제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간담회 모두 발언에서 박 회장은 재계의 실망감도 전달했다. 그는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지 4년 동안 40번에 가깝게 규제개혁 과제를 건의했지만, 상당수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김 부총리는 "정부는 속도감 있게 규제개혁을 추진하려고 한다"며 "(대한상의 건의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 부총리는 이날 '속도감 있는 규제개혁'을 강조했지만,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비슷한 상황은 지난해 11월에도 있었다. 박 회장은 지난해 11월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 부총리를 만나 보수·중도·진보를 아우르는 학자 50명의 자문을 거친 규제개혁 제언집을 전달했다. 이 책자에는 빅데이터·위성항법시스템(GPS)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관련 규제 현실과 고용·노동 부문 개선 과제, 기업의 공공성 강화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에도 김 부총리는 "정부와 기업은 경제 발전의 파트너"라며 "(제언을) 정책에 최대한 반영하도록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결과는 박 회장이 밝힌 것 그대로다. 수십차례에 걸쳐 건의해도 해결된 건 거의 없었다.

정부가 규제개혁을 진정성 있게 추진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날 대한상의가 마련한 '규제개혁 개선 방안'과 같은 자료는 정부가 먼저 만들었어야 한다. 기업은 정부에 규제개혁을 건의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규제를 컨트롤하는 주체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최근 김 부총리는 '최저임금 인상 속도조절론'을 놓고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등과 이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는 한국 경제 사령탑으로서의 입지가 모호하다는 비판도 들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규제개혁 등 혁신성장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리더십을 부각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 8일 제1차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를 연 데 이어 신세계그룹과 혁신성장을 주제로 간담회를 가진 것도, 이날 대한상의와 규제개혁에 대해 논의한 것도 최근 김 부총리에 대한 '패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행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날 간담회 이후에도 규제개혁에 대한 관료들의 접근 방식에 변화가 없다면, 일련의 혁신성장 관련 언론 공개 행사들은 결국 김 부총리의 입지 강화를 위한 '전시 행정'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양질의 일자리는 차세대 신성장 산업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마당에 정부는 신성장 산업을 가로막는 낡은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는 재계 건의를 형식적으로만 이해한다면, 또다시 역대 정부의 실패 사례를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이날 두 사람이 가진 고작 15분짜리 간담회는 규제개혁이 얼마나 더 험로를 걸을지를 예고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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