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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PEN대회 참석한 두 공산권 문인|중국이 자랑하는 지성 「쇼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는 중국의 장래를 늘 낙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의 변화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지성 「쇼첸」(소건)(77)이 서울국제펜대회 참가를 위해 27일 밤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몽고족으로 1910년 북경의 한 빈민가에서 성지기의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공산국가에 살면서도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작가·기자·교수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던 그는 『기자로서 제일 보람을 느꼈다. 기자는 국민의 입이기 때문에 숭고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8일 평소 친분이 두터운 허세욱 고대교수와 전통한식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봉은사를 구경했다는 그는 『봉은사는 중국북방의 사찰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한다.
17세 때인 1926년 북경 숭실중학 학생회장이던 그는 중국공산주의 청년당에 가입하나 장작림이 풀어놓은 밀정에게 걸려 감옥에 들어갔다가 학교측의 보증으로 이내 풀려나기도 한다.
1931년 명문 보인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역시 일류였던 연경대학으로 전학, 신문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 시절 세계적인 작가인 「에드거·스노」 교수를 만난 것이 그가 저널리스트경 작가로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스노」 교수는 문학과 저널리즘의 밀접한 관련성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드디어 연경대학 재학중인 1933년 대공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고 졸업 후에는 대공보문화부 기자로 인론계에 입문했다.
런던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국심미파소설』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한 그는 2차 대전 중 종군기자로서 유엔참석, 「히틀러」의 몰락·포츠담회담·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등을 취재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1945년 본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상해 복단대학 영문과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중공정권수립직후인 1950년 발표한 토지개혁에 대한 르포집 『토지회노가』(땅은 옛 주인에게로 돌아간다)는 세계 주요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1957년 우파로 몰려 창작권이 실권되었다가 22년만인 지난 1979년 복권됐다.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대만작가들과 만나게 된데 대해 『동포들을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다』 기뻐했다.
그는 중국사회에서의 자신의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묻자 「1933년부터 지금까지 비판과 고통을 당해온 작가」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가 난처한 듯 만면에 미소만 지어 보이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특정 주의보다는 내 자신을 믿어왔다』고만 말했다.
지난 79년 복권된 이후 해외각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강연을 해온 그는 83년 미 아이오와대에서 학생들로부터 『당신 나라에는 헌법이 있느냐. 기본권은 어떻게 보장하고 있느냐』는 등의 정치적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끝내 답변을 거부하는 대신 극작가 오조광이 답변하기도 했다.
80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한 그는 최근 12권짜리 전집을 출판했으며 오는 11월에는 최근 탈고한 회고록 『지도를 갖지 않는 나그네』를 펴낼 계획이다.
일본문학가인 부인 「원지루어」(문활야) 여사와 2남1녀가 있으며 현재 중국작가협회회원·중앙문화역사연구관 부과장·국제문화출판공사 부사장을 맡고 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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