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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연하 ‘나쁜 여자’에 빠지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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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호 20면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2> 상트페테르부르크: 더 미친 사랑

도스토옙스키가 ‘또’ 미친 사랑에 빠졌다. 이번에는 ‘더 미친’ 사랑이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2> 상트페테르부르크: 더 미친 사랑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문학 낭송회’가 유행이었다. 유명 작가가 일반인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기 소설을 낭송하는 모임으로, 요즈음의 ‘북 콘서트’와 비슷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양한 모임에 등장하여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는데,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높았다.

유부남 도스토옙스키와 18살 연하의 아가씨 수슬로바는 극단적인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갔다.

유부남 도스토옙스키와 18살 연하의 아가씨 수슬로바는 극단적인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갔다.

그날도 도스토옙스키의 발표는 성황리에 끝났다. 박수갈채에 도취된 작가에게 늘씬한 키의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폴리나 수슬로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어깨를 뒤로 젖히고 고개를 꼿꼿이 세운 아가씨는 깊고 푸른 눈으로 작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얼마 후 작가는 그 여성한테서 ‘팬레터’ 이상의 “진지한” 편지를 받았다. 외로움에 지쳐있던 도스토옙스키는 감동했고, 둘은 애인 사이가 되었다.

수슬로바는 셰레메치예프 백작가문 농노의 딸이었다. 영리하고 부지런한 아버지는 농노 해방 전에 이미 자유를 얻어 수도로 이주했다. 가게를 열어 번 돈은 모두 두 딸과 아들의 교육에 쏟아 부었다. 두 딸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러시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작은딸 나제주다는 러시아 최초의 여의사로 명성을 날렸다. 큰딸 폴리나는 대문호의 연인이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 못지않게 유명해졌다.

수슬로바는 마흔살 나이에 16살 연하였던 중학교 교사 로자노프와 결혼했다.

수슬로바는 마흔살 나이에 16살 연하였던 중학교 교사 로자노프와 결혼했다.

마흔한 살 먹은 소설가와 스물세 살 먹은 아가씨의 연애라니 썩 온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도스토옙스키는 투병 중의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런데 전기 작가들은 이들의 사랑을 기술할 때 불륜은 들먹이지 않는다. 가진 것 없고, 생긴 것도 보잘 것 없고, 간질에 치질까지 앓고 있는 중년남자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아가씨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나이 지긋한 작가는 열여덟 살이나 연하인 여성에게 완전히 휘어 잡힌 채 몇 년 동안이나 질질 끌려다녔다. 그녀는 청혼은 거절하면서도 작가를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우위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관계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수슬로바의 일기와 메모, 단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서 후대 연구자들이 출간한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가까웠던 나날들』(1928)에서 엿볼 수 있다. 남녀문제란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볼 때 그들의 연애는 강렬한 두 개성의 결합과 충돌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 작가를 사로잡은 수슬로바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일기는 청춘의 반항과 객기,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

로자노프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열혈 독자로 후일 평론가가 되어 그에 대한 평론을 썼다.

로자노프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열혈 독자로 후일 평론가가 되어 그에 대한 평론을 썼다.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인간을 존경할 수 없다. 그건 범죄다.” “무가치하고 허접한 것과 타협하느니 신께 영혼을 되돌려 주는 게 낫다.” 두 사람의 사랑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의 폭발에서 질투와 살벌한 상호비방과 이별, 그리고 더욱 뜨거운 재결합으로 이어지곤 했다.

갈등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성숙도’ 차이에 있었다. 수슬로바는 젊고 오만하고 무모하고 용감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전부 아니면 무’였다.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열정적이긴 했지만 이미 중년고개를 넘어선, 인생을 어지간히 아는 남자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영세 잡지사의 발행인이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전부”를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혼을 종용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차마 폐병으로 죽어가는 부인과 이혼을 할 수 없었다. 이혼은커녕 외도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마지막 몇 달은 지극정성으로 부인을 보살폈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어. 그는 이혼할 생각이 없더라고.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모든 걸 다 주었어. 그 사람도 똑같이 했어야 해.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수슬로바의 변덕도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1863년 그들은 파리에서 밀회를 약속했다. 그녀가 먼저 떠나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도착해보니 그녀는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스페인계 의대생 살바도르와 뜨거운 관계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절규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놈은 잘 생겼겠지, 젊겠지, 말도 번지르르하게 잘하겠지! 하지만 너는 결코 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못 찾을 거야!” 연인을 찾아가 보니 젊은 남자와 열애중인 상황은 몇 년 전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는지라 도스토옙스키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죽도록 좋아하고 죽도록 싸운 지독한 사랑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얼마 후 살바도르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러시아 여자가 무섭고 지긋지긋해서 문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충격을 받은 수슬로바는 며칠 동안 울고불고하다가 결국 도스토옙스키의 너그러운 품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하고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유럽을 여행했다. “얼마나 관대하고 얼마나 고상한 인간인가! 저 지성! 저 영혼!”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여행하면서 계속해서 싸우다 화해하다를 반복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지쳐갔다. “너는 한 남자를 이토록 오래 괴롭힐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결국 남자는 널 단념하게 될 거라고.”

부인이 죽자 도스토옙스키는 합법적인 구혼자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하루빨리 재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수슬로바는 초지일관 “완벽한 사랑”에 집착했다. 그들은 만나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냉각기 동안에 그는 호시탐탐 다른 여성과의 재혼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여전히 심리적으로 수슬로바에게 붙들려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에 있는 고급 쇼핑몰 ‘파사쥬’. 1860년대 초 파사쥬 내부의 홀에서는 문학 낭송회가 열리곤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에 있는 고급 쇼핑몰 ‘파사쥬’. 1860년대 초 파사쥬 내부의 홀에서는 문학 낭송회가 열리곤 했다.

둘의 관계는 1866년에 이르러서야 얼추 종결되었다. 수슬로바는 1880년에 중학교 교사이자 미래의 평론가 바실리 로자노프와 결혼했다. 그녀는 40세, 로자노프는 24세였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폭풍 같았다. 6년 후 수슬로바는 로자노프의 외도와 거짓말에 지쳤다며 지인 골돕스키와 야반도주했다.

그들의 결혼이 파탄에 이른 것이 누구 책임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슬로바는 분명 사악했다.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로자노프를 그녀는 조롱했다. “너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수 천명이지만 모두가 너처럼 짖어대진 않아. 사람은 개가 아니잖아.” 얼마 후 로자노프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수슬로바가 20년 동안이나 이혼을 안 해주는 바람에 사실혼 관계에 머물러야 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호적에 올릴 수도 없었다. 수슬로바는 고독하게 살다가 1918년 세바스토폴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신여성의 시대 옛 애인의 동생은 러시아 최초 여의사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성 해방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1860년에서 1865년 사이에 수도의 여성 인구는 4만 5000명이나 증가했다. 여성의 사회참여와 자주독립이 공공연하게 언급됐다. 여성 독자의 증가와 더불어 여성 저술가와 여성 전용 정기간행물이 문화의 전면에 등장했다. 소설가 흐보시친스카야는 전국의 여성들을 향해 외쳤다. “일, 지식, 자유, 이것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른바 ‘신여성’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시내를 활보했다. 공공장소에서 여봐란 듯이 담배를 피웠고, 페티코트를 거부했고, 신사가 문을 열어주면 촌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충분히 교육받고 돈과 의지를 갖춘 여성들이 독립적인 삶의 모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슬로바의 동생 나제주다는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20세기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질녀에게 인생 상담을 해 주는 편지에서 옛 애인의 동생인 나제주다를 “지인”이라 부르며 현대 여성의 귀감이 되는 인물로 소개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내 지인인 나제주다 수슬로바가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 시험을 통과하고 논문 방어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기사를 읽었단다. 아직 무척 젊은 여성인데 말이다. 보기 드문 인물이야. 관대하고 명예롭고 고결하지.”

『백치』『카라마조프가의 형제』속 센 여자로 부활

1928년 출간된 수슬로바의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가 까웠던 나날들』의 표지

1928년 출간된 수슬로바의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가 까웠던 나날들』의 표지

반면 폴리나는 존경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어갔다. “팜므 파탈”의 면모에도 30대 이후 그녀의 삶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았다. 흔히 지적되는 그녀의 드세고 지배적이고 불 같은 성격은 ‘신여성’의 역할 모델로 이어지지 못했다. 일단 그녀에겐 ‘뚝심’이 없었다. 1868년에 교사자격증을 딴 후 이바노보 마을에 농촌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곧 싫증이 나서 팽개치고 공부를 더 하겠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왔다. 그러나 공부 역시 지겨워서 오래 계속하지 못했다. 문학적 재능 또한 부족했다. 연애 초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잡지에 단편을 기고하기도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결코 ‘센 여성’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사실 도스토옙스키 인생에서 ‘진짜 센 여성’은 조금 더 있다가 등장한다.

그러나 수슬로바로부터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문학은 강렬하고 거대했다. 그가 훗날 창조한 강한 여주인공 대부분이 수슬로바를 모델로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도박꾼』의 폴리나에서 『백치』의 나스타샤와 아글라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카테리나와 그루센카에 이르는, 오만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인 여성들은 모두 수슬로바의 후예들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슬로바의 이기주의와 자존심과 변덕, 청춘의 열정과 상처와 다듬어지지 않은 용기를 문학으로 변형시켰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수슬로바는 다른 이유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 얘기는 다음 호에서 하자.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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