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의혹 ‘셀프 고발’ 법원장 35명도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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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며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며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뉴시스]

전국 법원장들이 7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및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의견을 모았다. 법관 경력 25년 이상의 최고참 판사들이 소장 판사들의 수사 촉구 행렬을 막아선 모양새다. 사법부 내에서 수사 반대 입장을 내놓은 건 서울고법 판사·부장판사 회의에 이어 세 번째다. 성낙송 사법연수원장, 최완주 서울고법원장 등 각급 법원장 35명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7시간여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안건은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의 조사 결과에 따른 형사상 조치 여부’ ‘추가적인 문건 공개 여부’였다. 논의 결과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전달하는 건의문 형식으로 공개됐다.

고법 판사·부장판사 이어 세 번째 #“재판 거래 의혹 합리적 근거 없어” #고발 않기로 한 특조단 결정 존중 #김명수 대법원장 “모든 의견 참고”

이들은 건의문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법관의 독립과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였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그 책임을 통감한다. 하지만 사법부에서 고발, 수사 의뢰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못 박았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들에 대해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한 특별조사단의 결론을 존중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수도권의 한 법원장은 “회의 초기부터 ‘수사 의뢰 반대’ 쪽으로 의견이 일치했다”며 “재판 거래 등이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수사를 의뢰하는 것은 의혹의 당사자에게는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권에 우호적인 대법원 판결들을 이용, 청와대를 설득하려 시도한 내용의 문건을 만들었다는 이른바 재판 거래 의혹이다.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과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 전략’ 등의 문건에는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가 관심을 두는 판결을 조사하고 판결 방향까지 연구한 정황이 담겼다.

법원장 절반 이상이 이 부분을 직접 언급했다고 한다. 결국 건의문에 “합리적인 근거 없는 재판 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는 명확한 표현이 적시됐다.

서울 지역의 한 법원장은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법무부와 ‘빅딜’을 검토하고 재판 거래를 의심케 하는 문건들을 만든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특별조사단이 ‘거래 시도를 위해 판결들을 나중에 취합했을 뿐 재판에 관여한 정황은 없다’고 했는데도 (일부 세력이) 대법원 판결이 흥정에 의해 바뀐 것처럼 몰아가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참석자는 “대법원 재판에서 거래를 한다? 법원행정처가 전원합의체에서 대법관들에게 압력을 넣어 재판 방향을 바꾼다? 이런 것들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장이 재판거래 의혹 클리어했어야” 의견도

현재의 대법원 재판 시스템에서 14명의 대법관이 특정 재판을 어떤 지침과 방향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이날 한 명씩 돌아가며 의견을 말하던 중 한 법원장은 “대법원장께서 재판 거래 의혹은 명확하게 클리어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안에 대해 “고발도 검토하겠다”고 했던 김 대법원장에 대한 사실상의 항의 표시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이날 또 다른 안건인 ‘추가 문건(법원행정처 컴퓨터에서 발견된 파일 410개 중 이미 공개한 98개를 제외한 문건) 공개 여부’는 추후 윤리감사관실에서 원칙을 정해 공개키로 했다.

이날 법원장들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등과 관련한 비공개 문서(특별조사단 187쪽 보고서 포함)까지 다 열람한 뒤 토론에 들어갔다. 회의 도중 직권남용의 적용 여부 등 법리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토론 직후 법원장들은 다같이 모여 입장문 문구까지 세부적으로 조율했다.

김 대법원장은 간담회에 참석하지 않고 추후 논의 결과만 전달받았다. 전국 법원장들이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수사의뢰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면서 김 대법원장의 고민이 깊어지게 됐다.

특별조사단 3차 조사 결과가 공개된 지난달 25일 이후 법원 내에서는 강경론과 신중론이 엇갈리고 있다. 3차 조사 발표 직후에는 관련자들에 대해 형사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강했다. 하지만 지난 4~5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회의, 서울고법 판사·부장판사 회의를 기점으로 실제 법원 차원의 검찰 고발이 이뤄질 경우 수사 과정에서 사법부 독립의 침해가 예상되고, 재판에도 부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오전 9시쯤 출근하면서 “여러 입장에 따라 의견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며 “모든 의견이 법원이 처한 현 상황이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결론을 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현일훈·손국희·문현경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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